항목 ID | GC09400308 |
---|---|
한자 | 蘆田 |
영어공식명칭 | Reed Fields |
이칭/별칭 | 노초전,노초답,노초전답,노전답,노초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백지국 |
[정의]
조선 시대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갈대를 수확했던 하천 저습지.
[개설]
김해는 낙동강 하구에 위치하여 노전(蘆田)이 발달하였다. 노전이란 하천의 퇴적 과정에서 형성된 저습지의 갈대밭을 말한다. 김해 외에도 양산을 비롯하여 황해도의 황주(黃州)·안악(安岳)·봉산(鳳山) 등의 지역에 발달하였다.
[관련 기록]
조선 시대 김해 지역의 노전 현황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 다만, 양안(量案)을 통해 일부 노전의 현황과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양안은 조선 정부에서 각종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전지(田地)를 측량하여 작성한 자료이다. 김해의 경우 조선 시대에 작성된 양안이 전해지지는 않지만, 양안 작성 때 누락되었다가 새롭게 발견하여 작성된 「경상도 김해부 노전 견루사처 양안(慶尙道 金海府 蘆田 見漏四處 量案)」이 전해진다. 「경상도 김해부 노전 견루사처 양안」은 1879년(고종 16)에 작성된 것으로, 새롭게 발견한 4곳의 노전을 등재하였다.
용동궁(龍洞宮)의 양안도 김해 지역 노전 연구의 자료가 된다. 용동궁은 왕실에서 사용하는 내당을 마련하던 궁가로, 김해부 노전을 절수(折受)하였다. 용동궁 양안 중 김해의 사정을 보여주는 자료로 1685년(숙종11) 작성된 『경상도 김해부 용동궁 절수 노답 타량성책(慶尙道 金海府 龍洞宮 折受 蘆畓 打量成冊)』을 비롯하여 『경상도 김해부 용동궁 궁둔 노초답개 타량성책(慶尙道 金海府 龍洞宮 宮屯 蘆草畓改 打量成冊)』[1690년]·『경상도 김해부 용동궁 절수 둔전답 경자타량성책((慶尙道 金海府 龍洞宮 折受 屯田畓 庚子打量成冊)』[1721년]·『김해부 소재 용동궁 노전답 구별성책(金海府 所在 龍洞宮 蘆田畓 區別成冊)』[1769년]·『김해부 소재 용동궁 노전 이생처 타량성책(金海府 所在 龍洞宮 蘆田 泥生處 打量成冊)』[1803년]·『김해부 소재 각면 용동궁 노전 이생처 타량성책(金海府 所在 各面 龍洞宮 蘆田 泥生處 打量成冊)』[1803년]·『경상도 김해부 소재 용동궁 속가락칠산우부덕도장 노전 자호복수 양안(慶尙道 金海府 所在 龍洞宮 屬駕洛七山右部德島帳 蘆田 字號卜數 量案)』[1846년] 등이 있다.
이밖에 『경상도 김해부 소재 선혜청 노전 타량성책(慶尙道 金海府 所在 宣惠廳 蘆田 打量成冊)』·『경상도 김해부 소재 무위소 노전 타량성책(慶尙道 金海府 所在 武衛所 蘆田 打量成冊)』 등의 성책류가 있다. 『경상도 김해부 소재 선혜청 노전 타량성책』은 1870년(고종 7) 김해부에 소재한 선혜청의 노전을 타량한 성책이다. 선혜청의 노전은 가락면(駕洛面)에 있었는데, 가락면은 현재 부산광역시 강서구이다. 『경상도 김해부 소재 무위소 노전 타량성책』은 1875년(고종 12) 경상도 김해부에 소재한 무위소의 노전을 타량한 성책으로, 선혜청의 노전이 무위소로 이전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 시대 자료는 아니지만, 1905년 일본 농상무성이 조사한 『한국토지농산조사보고』를 통해 20세기 초 김해의 노전 분포와 규모를 확인할 수 있다.
[김해부 노전의 존재 형태]
조선 시대 김해 지역 노전은 4개의 유형으로 존재하였다. 첫째, 내륙 저습지 형으로, 칠산면과 가락면에 분포하였다. 둘째, 조선 전기부터 큰 섬으로 존재하였으며 전기부터 후기까지 점진적으로 개간되었는데, 명호도·대저도 등이 대표적인 지역이다. 셋째, 조선 전기에는 전체가 노전이었으나, 후기에 대부분 전답으로 개간되었던 곳인데, 덕도·전산도·죽도·대산리·수봉도 지역에서 나타난다. 넷째, 조선 후기 생성된 작은 섬으로 전체가 노전인 곳이다. 영도, 사도 등의 지역에서 발달하였다.
[김해부 노전 경영]
노전에서 생산되는 것은 갈대이다. 갈대는 품질에 따라 정로(正蘆)-추목(秋木)-아랑(芽郎)으로 구분된다. 정로와 양호한 추목의 경우 온돌 깔개인 삿자리[노점(蘆簟)]·삿갓·발 등의 원료로 사용하였다. 특히 삿자리는 김해 지역의 필수품으로서 수요가 높아 농가의 부업이나 전업으로 생산하였다. 따라서 정로를 생산하는 노전의 수익은 내륙 전답보다 나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품질이 떨어지는 추목과 아랑은 주로 취사나 염전의 땔감으로 사용하였다. 품질이 떨어지는 갈대는 말려서 지붕을 잇는 데 사용하기도 하였고, 어린 갈대는 식용이나 전답의 퇴비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갈대를 이용한 수공업은 부가가치가 매우 높았으므로, 조선 후기 김해 지역에서도 갈대를 원료로 한 수공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현황을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1929년 조사를 보면 김해의 주요 공산품 판매 중 갈대로 만든 삿자리·삿갓의 판매액이 전체의 56.5%를 차지하였던 것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밖에 농경지·노전·염전·어기(漁基)[고기잡이 하는 곳] 등 다양한 형태로 이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