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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부터 1863년까지 경상남도 김해 지역의 역사와 문화. 조선 개국 초 김해 지역은 김해부(金海府)로서 지부사(知府事)가 파견되어 통치하고 있었다. 이후 정부의 지방통치체제 개편 과정에서 1413년(태종 13) 도호부(都護府)가 설치되었고, 도호부사(都護府使)가 파견되어 통치하였다. 1895년 23부제로 개편될 때까지 읍격의 변화 없이 도호부로 존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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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선 시대 김해도호부의 하위 행정 체제. 면리제(面里制)는 국가가 지방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군현의 하부 단위로, 면과 리로 세분하여 편제한 행정 제도이다. 면리라는 용어는 고려 시대부터 확인되나, 본격적으로 제도화한 것은 조선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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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긴급한 상황을 횃불과 연기로써 중앙에 전달하였던 통신 제도. 한국 봉수는 삼국 시대부터 지명이나 왕명을 통해 봉수 운영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제도화된 봉수는 고려 시대부터였다고 보이고, 고려 봉수의 운영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곳이 김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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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경상남도 김해 지역을 포함하여 전국에 설치하였던 지방 군사 조직을 일원적으로 구축한 방어 체제. 진관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명문화된 조선 전기의 지방 군사 조직인데, 주진(主鎭)-거진(巨鎭)-제진(諸鎭)의 체계로 이루어졌다. 1457년 중앙[수도] 방어를 위해 오위(五衛) 체제를 정비하면서 지방의 군사 방어 체제로서 진관제(鎭管制)를 함께 시행하였다. 진관제는 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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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었던 성곽. 조선 시대 치소인 읍성의 사전적 의미는 “지방의 부(府)·군(郡)·현(縣) 등 행정 관서가 마련된 고을에 축조되어 유사시에 외적을 대비하는 한편, 행정적 편의를 제공한 성곽을 지칭" 하는데, 기원에 대해서는 통일 신라 시대나 고려 시대로 보는 등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며, 평지에 읍성이 축조되기 이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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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설치되었던 지방 행정 구역.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는 조선 시대 김해 지역에 설치되었던 지방 행정 구역이다. 1413년(태종 13)에 설치되어 1895년(고종 32) 23부제가 실시되어 진주부 김해군으로 개편될 때까지 도호부로 존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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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김해시 대성동, 동상동, 서상동, 봉황동 일원의 평지에 축조되었던 읍성. 김해읍성은 분산성의 남서쪽에 형성된 김해 시가지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대 사회부터 이용되었던 낙동강 수로의 출발점이며, 왜구 방어의 요해처였다. 1451년(문종 1)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 정분(鄭苯)의 서계(書啓)에 의하면 ‘읍성은 세종 16년(1434) 동[해동문(海東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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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김해부 출신 이도장이 일으킨 사건. 이도장(李道章)은 조선 후기 김해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영조실록(英祖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보면 이도장은 1725년(영조 1)과 1726년(영조 2)에 노론의 입장을 대변하는 소청 활동을 하였다. 1725년 상소에 ‘소두(疏頭)’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경상도에서 활동하고 있던 노론계 인사들에게 명망이 있었던 인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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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갈대를 수확했던 하천 저습지. 김해는 낙동강 하구에 위치하여 노전(蘆田)이 발달하였다. 노전이란 하천의 퇴적 과정에서 형성된 저습지의 갈대밭을 말한다. 김해 외에도 양산을 비롯하여 황해도의 황주(黃州)·안악(安岳)·봉산(鳳山) 등의 지역에 발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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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설치한 지방 군영. 별중영(別中營)은 김해진영(金海鎭營)에 소속된 속오군(束伍軍)을 지휘·훈련하기 위해 인조[1623~1649] 연간에 설치되었다. 김해도호부사가 별중영장을 겸직하였으며, 1728년의 무신란 때에는 경상우도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하였다. 1895년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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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김해 지역 낙동강 하류 포구에 있었던 해상 교통 시설. 수참은 조창, 화물 운송 뿐만 아니라, 사객 이동을 보조하는 해상 교통 시설이었다. 김해 지역은 낙동강과 남해를 연결하는 낙동강 하구 유역에 위치하였고, 일찍부터 각종 물자의 운송과 함께 왜인들이 자주 오가는 곳이어서 이러한 시설을 설치하는데 최적의 입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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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김해시에서 토기, 자기, 기와 등을 구웠던 가마터. 자기소는 가마터라고 불리며, 각종 토기, 도기, 자기, 벽돌, 기와 등을 구웠던 시설이다. 이 시설들은 원료와 연료를 쉽게 확보하고, 생산품의 유통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교통로가 확보된 산지의 구릉 사면에 구축되었다. 2023년 현재, 김해 지역에서는 토기가마터 8곳, 기와가마터 9곳, 자기가마터 5곳의 분포가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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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부터 일제 강점기에 걸쳐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정기적으로 열렸던 시장. 조선 후기 상품 화폐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전국적으로 장시가 크게 발달하였다. 당시 장시는 산간 지역까지 확대되었는데, 전국에 약 1,000여 개의 장시가 열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고립·분산적으로 열렸던 장시가 18세기 무렵에는 인근 4~5개의 장시가 장날을 바꾸어가며 연차적으로 열리는 ‘5일장’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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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김해부사의 행정을 보좌하던 향촌 자치 기구. 향청(鄕廳)은 조선 시대 김해도호부 재지 사족의 동향을 보여주는 기구 중 하나였다. 조선 전기 유향소(留鄕所) 등으로 불리며 향촌 자치 기구로 활용되었고, 조선 후기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 구조가 흔들리고 수령권이 강화됨에 따라 점차 수령을 보좌하는 기구로 변하였다....
역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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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운영되었던 역과 원. 역(驛)은 역로(驛路)와 역마(驛馬)를 관리하고, 공무 수행자에게 교통 편의를 제공하였던 곳으로, 김해에 설치되었던 역은 자여도(自如道)에 속하였다. 원(院)은 숙박 시설로, 공무 수행자나 일반 여행자를 위해 마련되었는데, 주로 관아 근처나 역, 역과 역 사이에 설치되었다. 역과 원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설치, 운영되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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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부터 1896년까지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금곡리에 있었던 역참. 금곡역(金谷驛)은 고려 전기에 실시되었던 22역도제 중 금주도에 속한 31개 역 중 하나였다. 조선 시대에는 세조 연간에 41역도제로 개편하면서 자여도(自如道)에 소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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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김해시 삼정동 활천고개 아래에 설치되었던 국영 숙박 시설. 남정원은 자여도에 속한 남역에 인접하였으며, 조선 시대 김해부를 오가는 관료들을 위해 설치한 국영 숙박 시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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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김해시 부곡동에 있었던 국영 숙박 시설. 냉천원은 자여도에 속한 성법역과 적항역 사이에 있었으며, 조선시대 김해에서 창원을 오가는 관료들을 위해 설치한 국영 숙박 시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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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시례리에 있었던 국영 숙박 시설. 노현원은 자여도의 자여역과 성법역 사이에 위치하였으며, 조선 시대 김해와 창원을 오가는 관료들을 위해 설치한 국영 숙박 시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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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부터 조선 시대까지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덕산리에 있었던 역참. 덕산역(德山驛)은 고려 전기에 실시된 22역도제 중 금주도에 속한 31개 역 중 하나였다. 조선 시대에는 세조 연간에 41역도제로 개편하면서 자여도(自如道)에 소속되었다가 18세기 말~19세기 초에 황산도로 이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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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에 있었던 국영 숙박 시설. 북정자원은 김해읍성에서 금곡역 사이에 위치하였으며, 조선 시대 김해와 밀양을 오가는 관료들을 위해 설치한 국영 숙박 시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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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김해시 삼계동에 있었던 국영 숙박 시설. 삼기원은 김해읍성과 금곡역 사이에 있었으며, 김해에서 밀양을 오가는 관료들을 위해 설치한 국영 숙박 시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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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부터 1896년까지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산본리에 있었던 역참. 성법역(省法驛)의 본래 이름은 성잉역(省仍驛)으로서 고려 시대 22역도 중 금주도에 속한 31개 역 중 하나였다. 조선 시대에는 세조 연간에 41역도제로 개편하면서 자여도(自如道)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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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김해시 지내동에 있었던 국영 숙박 시설. 이수원은 김해시 삼정동에 위치한 남역과 대동면 덕산리에 위치한 덕산역 사이에 위치하였으며, 조선 시대 김해와 양산을 오가는 관료들을 위해 설치한 국영 숙박 시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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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부터 1896년까지 경상남도 김해시 관동동에 있었던 역참. 적항역(赤項驛)은 고려 시대 22역도 중 금주도에 속한 31개역 중 하나였다. 조선 시대에는 세조 연간에 41역도제로 개편하면서 자여도(自如道)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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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초정리에 있었던 국영 숙박 시설. 초령원은 남역과 덕산역 사이에 위치하며, 조선 시대 김해와 양산을 오가는 관료들을 위해 설치한 국영 숙박 시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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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설치되었던 국가의 교통 수송 기관. 해양원은 조선 전기의 교통 수송 기관인데, 김해의 낙동강 변에 설치하여 국가가 운영한 여관의 기능을 가진 건물이었다. 현재 김해시 생림면 생철리에 해당하는데, 조선 후기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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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월촌리에 있었던 국영 숙박 시설. 황산원은 고려 전기 교통 수송 기관으로서 김해의 낙동강 변에 설치하여 국가가 운영하던 여관의 기능을 가진 건물이었다. 현재의 김해시 대동면 월촌리에 해당하는데, 조선 후기 영조 대에 양산으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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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김해시 흥동에 있었던 국영 숙박 시설. 흥복원은 조선 전기 김해부 서쪽에 설치하였던 교통 수송 기관으로, 국가가 운영하던 여관의 기능을 가진 건물이었다. 현재의 김해시 흥동에 해당하는데, 조선 후기에 폐지되었다....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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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1598년 일본이 조선을 침입해 경상남도 김해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졌던 전쟁. 일본의 도발로 발생한 임진왜란 개전기에 김해 지역은 일본군 제3군의 침입로와 침략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강화회담기에 일본군은 죽도 왜성 등을 쌓고 지배를 하면서 김해 지역민을 수탈하였다. 정유재란기에도 김해 지역은 초기에 부산 다대포에 상륙한 일본군의 침략을 받았으며, 왜성에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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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경상남도 김해시 동상동 일원의 김해성에서 있었던 조선군과 일본군의 전투. 임진왜란 초기에 김해 지역은 일본군 제3군의 침략로에 있었다. 이에 김해성을 둘러싸고 4월 19~20일에 걸쳐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비록 수적인 열세로 함락되었지만, 김해부사 서예원의 도망 이후에도 지역의 군·관·민은 끝까지 김해성을 지키다가 전사했다. 전쟁 초기에 김해성 전투는 일본 3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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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시기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왜군이 쌓은 성. 왜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공한 후, 남해안을 중심으로 왜군의 근거지를 확보하거나 서로 간의 연락 및 조선군의 공격에 대비하고자 축성한 일본식 성곽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전선의 확장과 함께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축성한 성[계성(繫城), 전성(傳城)]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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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 김해 지역에서 활동했던 일반 백성으로 구성된 비정규 군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성리학을 이념으로 한 조선에서는 8도에서 수많은 백성이 의병에 참여하였다. 오랫동안 해당 지역에서 살아온 의병은 양반층인 재지사족(在地士族)과 하층민이 결합하여 단기간에 조직될 수 있었다. 비정규군이었던 의병은 지형을 이용한 매복이나 기습 작전으로 일본군을 공격하여 많은 성과를...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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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김해시의 낙동강을 비롯한 주요 하천을 통해 선박이 주변 지역으로 넘나들 수 있도록 만든 교통 시설. 나루는 일찍부터 하천을 활용한 교통이 활성화되면서 수심이 얕고 유속이 빠르지 않는 하천(河川) 또는 하구(河口) 연안의 곳곳에 형성되었다. 고문헌에서 나루는 도(渡), 진(津), 포(浦) 등이 설치된 곳을 지칭하며, 그 주변에는 물자 운송 등의 교통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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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월촌리에 있었던 나루. 달당나루는 월당진이라고도 하며, 조선 시대에는 동원진으로 불렸다고 전해진다. 김해 대동면에서 양산 물금읍으로 연결되었던 나루이다. 나루 지명은 나루가 있는 월당마을에서 유래되었으며 ‘월당’은 달음개향이 있었기에 달 월(月) 자를 차용하여 이름을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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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 마산마을에 있었던 나루. 조선 후기 낙동강 하구에 위치하였던 산산창(蒜山倉)을 운영하는데 사용되었는데, 정부의 재원을 확보하고 진휼을 위해 주로 명지도에서 생산된 소금을 이송하는데 이용되었다. ‘산산(蒜山)’이란 지명은 현재 지명인 ‘마산(馬山)’과 같은 뜻을 가진 것으로서 중심에 있는 산, 들, 마을 등을 이르는 우리말 ‘말뫼’와 관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