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313
한자 堤堰
영어공식명칭 Cheon
이칭/별칭 언제(堰堤),방죽,제방(堤防)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안성현

[정의]

고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농업을 위해 만들었던 수리 관개 시설.

[개설]

김해 지역은 하천과 바다가 접하는 지리적 특성 상 범람을 막고 농업 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제언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제언을 축조하고 활용하였는데, 김해 봉황동 제방유적을 통해 고대 금관가야 때부터 제언을 축조하였던 것이 확인되었다.

[제언의 등장과 역사]

전근대의 한국 사회에서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었다. 따라서 안정적인 농업 생산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고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수리 시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고대의 제언 중 문헌에 이름이 나오는 것은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 상주 공검지, 제천 의림지, 의성 대제와 시제, 영천 청제 등이 있다. 발굴 조사에서 김해 봉황동 제방유적, 함안 가야리 제방유적, 울산 약사동제방, 밀양 구위양지 등이 확인되었다.

고대 수리 시설 가운데 발굴 조사나 문헌 기록을 통해 대략적인 시기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부족하다. 다만, 제언에 대한 기록과 금석문은 토지 국유를 원칙으로 고대 국가를 형성한 삼국이 쌀을 조세의 대상으로 삼은 시기와 일치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쌀 재배 면적의 확산과 생산량 증가는 국가 뿐만 아니라 토지 소유자와 생산자 모두의 관심사로 부각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의 농업 기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료로 「개선사 석등기(開仙寺 石燈記)」를 들 수 있다. 이 자료에 보이는 저답(渚畓)과 오답(奧畓)은 논의 위치에 따른 표현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전통은 고려 시대로 계승되어 시지(柴地), 산전(山田)이 개간되었고 12세기 이후 수리 관련 토목 기술과 접합되어 고려 후기에는 저습지와 연해지 개발이 가능해졌다.

조선 시대에는 농업 기술이 크게 발전하여 파종 방법도 종래의 직파법(直播法)에서 이앙법(移秧法)으로 바뀌었다. 이앙법은 적절한 시기에 물을 대는 것이 필수적이었으므로 조선 후기에는 각종 수리시설이 만들어졌다. 조선 정부는 수리 시설을 효율적으로 축조 및 관리하기 위하여 1662년(현종 3)에 『진휼청제언사목(賑恤廳堤堰事目)』과 1778년(정조 2)에 『제언절목(堤堰節目)』을 제작하였다.

[김해 지역의 제방]

김해 지역은 널리 알려진 것과 같이 낙동강과 남해가 합해지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에 따라 김해 시가지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신어천해반천, 조만강이 흘러 남해에 유입된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으로 인해 곳곳에 제방이 위치하였을 가능성이 크지만, 제방과 관련된 문헌 기록은 없다. 다행히 발굴 조사에서 금관가야의 제방이 확인되었다.

제방은 김해시 봉황동 423번지 일원으로 수로왕릉의 서쪽에 위치한다. 북쪽의 대성동고분군과 남쪽의 봉황대유적 사이의 안부(鞍部)[산마루가 움푹 들어간 곳]에 해당하며, 구릉의 말단부에서 저습지로 이어지는 곳이다. 제방의 기초부(基礎部)는 저습지의 연약한 바닥 위에 만들어졌는데, 두 차례에 걸쳐 쌓았다. 기초부에는 지지력(支持力)을 강화하기 위해 부엽공법(敷葉工法)이 적용되었다.

기초부 위로 본격적인 성토 시설(盛土 施設)을 축조하였는데, 나무로 틀을 짠 후 할석을 채웠다. 나무틀은 성토된 기초부 위로 거칠게 가공한 20~25㎝의 원목을 가로 2~3m, 세로 1.5~2m의 규모로 정(井)자형으로 만들었다. 남아 있는 원목의 범위로 보아 제방의 전 범위에 시설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틀이 완성된 이후 할석과 잡석을 채웠는데, 북쪽 가장자리의 단면에서 계단상으로 쌓아 올린 흔적이 확인되었다. 그 이유는 제방의 정상을 볼록하게 만들어 수압에 의한 붕괴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형태의 제방은 흙을 주로 사용한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 제방과는 차이가 분명하며, 금관가야의 토목 기술이 적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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