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 침입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322
한자 倭寇 侵入
영어공식명칭 Invasion of Japanese Pirate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223년 5월연표보기 - 왜구 김해 최초 침입

[정의]

고려 후기 왜구가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침입하여 약탈한 사건.

[개설]

왜구가 1223년(고종 10) 김해 지역을 노략질한 사건을 시작으로, 충정왕 대부터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왜구의 침입은 이후 남해와 서해 연안 지역은 물론 수도 개경까지 위협함으로써 전국에 위기 상황을 조성하였다. 왜구는 2, 3척의 배를 타고 와서 노략질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규모가 클 때에는 200~500척의 대규모 해적선단이 수천 명의 인원으로 침범할 때도 있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그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지역은 경상도 연해 지역이었다. 왜구 침입은 전국적으로 529회 정도 발생하였고, 이 가운데 경상도 지역에는 114회 정도의 침입이 있었으며, 김해 지역은 13회에 걸쳐 침탈당했다.

[역사적 배경]

왜구는 대략 13~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일본인 해적 집단을 총칭하는 말이다. 왜구가 발생하게 된 배경은 당시 일본이 남북조 쟁난기에 처하여 사회적 불안이 증대되는 가운데, 무사들의 토지 쟁탈, 농지를 잃은 농민의 빈곤화, 경제적으로 무력해진 하급 무사의 양산, 기근에 허덕이고 있던 쓰시마[對馬]·이키[壹岐]·마쯔우라[松逋] 지방의 열악한 상황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결과였다. 왜구들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고 생활 필수품을 얻기 위하여 고려를 침입하였다.

[경과]

왜구가 고려에 처음으로 침입한 시기는 1223년(고종 10) 5월인데, 이 때 왜구가 침탈한 곳이 바로 오늘날 김해시인 금주(金州) 지역이었다. 왜구는 이로부터 3년 뒤인 1226년(고종 13) 6월에도 김해 지역을 침입하여 노략질하였고, 1227년(고종 14) 4월에도 침입하였으나 격퇴당하였다. 이 때 방호별감 노단(盧旦)은 왜구가 침입하자 출병하여 적선 2척을 나포하면서 왜적 30여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리고 병장기를 노획하였다. 1263년(원종 4) 2월에는 금주의 속읍인 웅신현의 물도(勿島)와 연도(椽島)에 왜구가 침입하여 우리 선박에 실려 있던 세곡미 120석, 세포(細布) 43필을 탈취하였는가 하면, 주민의 일용품까지 약탈하여 갔다.

이후 한동안 뜸했던 왜구 침입은 1350년(충정왕 2), 경인(庚寅)년에 남해안 각지에서 왜구가 극성을 부린 이후 다시 파상적인 침탈이 이어졌다. 김해 지역에도 고려 말까지 9회에 걸친 왜구 침입이 있었다. 1361년(공민왕 10) 8월 왜구는 동래와 울주에 침입, 이 곳을 불태워 약탈하였고 조선(漕船)을 탈취하는 한편, 김해 지역과 양주(梁州)·사주(泗州)·밀성군(密城郡)을 차례로 노략질하였다. 1364년(공민왕 13) 3월에는 왜구가 병선 200여 척을 동원하여 김해 지역과 하동, 고성, 사천, 밀양, 양산 등의 지역을 침탈하였다.

우왕대 김해 지역의 왜구 침탈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1375년(우왕 1) 11월의 왜구 침입으로 김해 지역의 행정 중심인 관아와 성곽이 모두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 도순문사 조민수(曺敏修)가 맞서 싸웠으나 패배할 정도였다.

1377년(우왕 3) 3월에 접어들어 남해 연안 지역에 대한 왜구의 공세는 더욱 강화되고 있었다. 경상도 원수 우인열(禹仁烈)의 보고에 따르면, 이 때 왜구는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뒤덮어 돛과 돛대가 이어질’ 정도의 대선단을 이끌고 남해 연안 지역을 공격해 왔다. 당시 김해부사 박위(朴葳)는 황산강 어귀로 침입해 오는 왜구 29급을 베는 한편, 많은 수의 왜구를 강에 빠져 죽게 하는 전과를 올렸다.

박위의 왜구 토벌은 1377년(우왕 3) 5월의 황산강전투에서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다. 왜구는 김해 남쪽 포구에 50척의 선단을 정박시켜 놓고서 이곳으로부터 황산강을 거슬러 올라 밀양을 공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왜구의 이 계획은 박위의 활약으로 저지되었는데, 왜구의 공격 정보를 입수한 박위는 황산강의 양쪽 언덕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수군 30척을 거느리면서 기다리고 있다가 왜선이 강 어귀로 들어오자 일제히 공격하여 이들을 섬멸시켰다.

박위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김해 지역의 왜구 침입은 이 후에도 몇 차례 계속되었다. 1377년(우왕 3) 11월, 왜구는 병선 130여 척을 동원하여 김해부와 의창현을 노략질 하였는데, 도순문사 배극렴(裵克廉)이 분전하였으나 패배하였다. 1380년(우왕 6) 1월 왜구는 김해부를 불질렀고, 1381년(우왕 7) 6월에는 병선 50척으로 김해부를 침탈하여 산성을 포위하기까지 하였으나, 원수 남질(南軼)이 공격하여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한 달 뒤 왜구는 다시 김해부를 약탈하였다. 그리고나서 고려 말까지는 침탈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결과]

왜구 침입 목적은 재화의 약탈이어서, 이들은 곡식을 저장해둔 관창을 습격하였고, 혹은 해상에서 조운선을 공격하여 양곡을 탈취하거나 인명을 살상하였다. 왜구의 잦은 침탈로 말미암아 경상도 연해 고을은 인명 살상, 촌락 파괴, 관청 방화, 농토의 황폐화 등 인명과 경제적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인구 이동을 불러와 지역사회의 변동을 초래하게 하기도 하였다. 급암(及菴) 민사평(閔思平)은 ‘김해 부사에게 부치다’라는 시에서 왜구 침탈에 대해, “지금은 무슨 일로 자주 침범하여, 우리 백성들의 즐거운 낯빛 사라지게 하는가. 방어 때문에 촌민들 괴로울 뿐만 아니라, 뒤쫓아 잡는 일이 차츰 형을 번거롭게 하리라. 비록 종군하더라도 싸울 뜻이 없고, 집에 있는 자도 징발된 자만큼 편안치 않네.”라고 하여, 왜구 침탈로 말미암아 촌락민이 당하고 있던 고통, 방어와 토벌이 어려운 사정을 잘 표현해 주었다.

[의의와 평가]

고려 후기 왜구 침입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큰 피해를 가져왔다. 국고 수입의 원천인 조세를 운반하고 보관하던 조운선과 조창이 약탈 대상이 됨으로써 국가 재정을 파탄 상태로 몰고 갔다. 조세를 내륙으로 운반하려는 육지 운송을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하였고, 국가의 재정 수입은 날로 줄어들어 녹봉을 지급하지 못하거나 군량미의 부족까지 초래하는 등 경제적 위기에 봉착하였다. 정치적으로도 개경의 계엄령에 따른 민심의 동요, 천도론의 대두로 인한 조정 상하의 불안감, 민가의 약탈 등은 정치적 불안을 가중시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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