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족인의 봉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323
한자 雜族人- 蜂起
이칭/별칭 금주 잡족의 난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신은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200년 8월 10일연표보기 - 잡족인의 봉기 발발
종결 시기/일시 1200년 8월 10일 - 잡족인의 봉기 종결
성격 무인집권기 발생한 김해 잡족인들의 항쟁
관련 인물/단체 이적유

[정의]

고려 후기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발생한 잡족인들의 항쟁.

[개설]

1200년 8월 계사일[癸巳日, 10일] 김해 잡족인(雜族人)들이 자신들을 수탈하던 김해의 향리들을 처단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해부사 이적유(李迪儒)와 호족(豪族)들이 연합해 반란을 진압하였다. 잡족인은 고려에 귀화하거나 포로로 잡혀 온 여진, 거란인 등 으로 추정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고려 시대 김해의 지배 세력이었던 향리들은 고려 건국 초부터 상당한 지방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991년(성종 10)에 김해부(金海府)양전사(量田使)로 파견된 중대부(中大夫) 조문선(趙文善)은 수로왕의 능묘(陵廟)에 소속된 밭의 면적이 많아 15결로만 제사를 지내게 하고 나머지를 역부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건의하였다. 하지만 중앙 조정에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반대하였는데 조문선은 끝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양전이 거의 끝날 즈음 조문선은 귀신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꿈을 꾸었고 이후 조문선은 병들어 김해에서 사망하였다. 설화로 윤색된 내용은 귀신에게 시달리다 죽은 것이었지만,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지역에서 횡사한 것은 예사롭지 않은 것으로, 지역의 토착 세력에게 죽임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즉 조문선의 사례는 김해 지역 향리들의 힘이 상당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김해 지역 향리들의 강고한 힘으로 인해, 김해의 하층민으로 판단되는 잡족인들은 향리, 즉 호족들에게 억압적인 지배를 받으면서 갈등이 고조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경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던 김해의 향리들은 자신들의 힘을 토대로 민(民)들에 대한 과도한 수탈을 자행했을 것이고, 이것이 김해의 농민들로 추정되는 잡족인들의 항쟁을 낳았을 것이다. 잡족인들은 “탐오하고 포악한 자들을 제거하여 우리 고을을 깨끗이 하려고 하였다.”고 김해부사 이적유에게 주장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탐관오리란 김해의 향리들이다. 잡족인들은 김해 향리들이 수탈을 자행해 이에 대한 저항으로 봉기한 것이었다.

항쟁 초기 잡족인들은 향리[호족]들을 죽이고 성밖으로 몰아낼 정도로 일시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김해부사 이적유가 잡족인들에게 활을 쏘아 주동자를 죽였다. 이후 이적유는 한편으로는 잡족인들을 회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향리[호족]들과 연대해 잡족인들의 항쟁을 진압하였다.

[결과]

김해부사 이적유와 호족인들이 연대해 잡족인들의 항쟁을 진압하였다.

[의의와 평가]

김해 지역 잡족인들의 항쟁은 이 시기 항쟁과 유사하면서도 특이성을 보이고 있다. 무인집권기 당시 지방 하층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지방관은 해당 지역의 향리들과 연대해 하층민들의 항쟁을 진압하곤 하였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전주 민의 항쟁에 대한 진압이었다. 김해 잡족인의 항쟁 역시 그와 유사한 패턴을 띠었다. 반면 김해 지역 잡족인의 항쟁은 나름의 고유성도 지니고 있었다. 지방의 하층민들은 통상 지방관과 향리들을 함께 공격하였는데 김해의 경우 지방관인 김해부사 이적유는 공격하지 않았고 향리들만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는 김해 지역의 향리들이 다른 지역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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