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해도부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332
한자 東南海都部署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신은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939년연표보기 - 동남해도부서 설치

[정의]

고려 전기 동남해 지역의 방어를 위해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있었던 군사 기구.

[개설]

도부서는 고려 시대 국방상의 요충지에 설치된 군사 기구로서, 총 5개의 도부서가 설치되었다. 동계 지역에는 진명도부서(鎭溟都部署)와 원흥도부서(元興都部署)가 설치되었고, 북계 지역에는 통주도부서(通州都部署)와 압강도부서(鴨江都部署)가 설치되었으며, 동남 연해 지역에 동남해도부서가 설치되었다. 동남해도부서는 본영을 경주와 김해 두 곳에 옮겨 가며 두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려 태조는 939년(태조 22) 처음 동남해도부서를 경주에 설치하였는데 이는 크게 2가지 요인이 작동한 것으로 이해된다. 첫째는 동남 연해 지역 즉 지금의 경상도 동남해 연안은 일본 혹은 동여진의 침입으로 인한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는 점이다. 둘째는 동남 연해는 일찍부터 일본과 교류가 빈번했던 지역으로서 방물의 진상 혹은 표류민의 송환과 같은 외교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발생했던 곳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고려는 경주와 김해에 번갈아 동남해도부서를 설치하였다.

[내용]

동남해도부서는 939년 처음 설치된 이후 우왕 대까지 경주와 김해를 오가며 본영이 설치되었다. 본영을 옮겨가며 설치했다는 점은 동남해도부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본영의 이동은 해당 시기의 특정한 사정에 기인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문종 대 경주에서 금주로 본영이 이동한 것은 이 시기 일본 표류민 송환 혹은 일본과의 교류에서 금주가 중요해졌기 때문이었다. 문종 대 이전했던 동남해도부서는 1190년(명종 20) 다시 경주로 본영을 이전하였다. 이 때 본영의 이전은 경주에서 발생한 농민 반란 때문이었다. 농민 반란이 발생하자 군사 기구인 도부서를 경주로 이전하여 경주를 안정시키려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1202년(신종 5) 경주의 별초가 반란을 일으켜 인근 고을을 침략하자 다시 동남해도부서 본영을 금주로 옮겼다. 이처럼 도부서는 경상도 동남해 지역의 정세에 따라 본영이 이전되었다. 도부서에는 도부서사가 파견되었는데 이들은 대개 종5품에서 정5품의 관원이 임명되었다. 동남해도부서의 관할 지역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의견이 다양한데, 대체로 ‘동남해’라는 명칭에 따라 지금의 경상도 연해 지역을 관할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변천]

939년 동남해도부서가 경주에 설치되었다가 1078년 본영을 금주로 이전하였다. 1190년 본영을 다시 경주로 옮겼다가 1202년 또다시 금주로 옮겼다.

[의의와 평가]

동남해도부서는 동남 연해 지역의 군사적 방어 뿐 아니라 일본과의 교류에도 일정한 역할을 담당한 군사 기구였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