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객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335
한자 金州客館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부(전통 시대)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배상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창설 시기/일시 1049년 이전 - 금주객관 경주에 설치
창설 시기/일시 1078년연표보기 - 금주객관 경주에서 김해로 이전
폐지 시기/일시 1268년 - 대일외교 단절로 폐지 추정

[정의]

고려 시대 일본과의 외교 및 교역을 목적으로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설치되었던 숙박 시설.

[개설]

금주객관은 11세기 초 원활한 대일(對日) 관계를 위해 설치되었던 공공 숙박 시설로, 일본의 사신과 상인을 상대로 무역과 외교를 전담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1078년(문종 32)에는 동해 남부와 남해 지역의 방어를 담당하는 동남해도부서(東南海都部署)의 본영(本營)이 경주에서 금주로 옮겨왔고, 금주는 동남해 수군(水軍)의 중심이자, 고려를 찾는 일본 상인이나 사절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금주객관은 고려를 찾은 일본 상인이나 사절의 호송, 표류민 송환, 외교 문서 수령 등 대일 외교 업무를 수행할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조직 및 담당 직무]

동남해도부서(東南海都部署)에서 금주객관의 조직 및 관리 업무를 담당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관련 기록]

『고려사』 권7, 문종 3년[1049] 11월 무오[29일] : 동남해선병도부서사(東南海船兵都部署司)가 아뢰기를, “일본(日本) 대마도(對馬島) 관청에서 수령(首領) 명임(明任) 등을 보내어, 그곳에 표류했던 우리나라 사람 김효(金孝) 등 20명을 금주(金州)로 압송해 왔습니다”라고 보고하니, 전례에 따라 명임(明任) 등에게 예물을 하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고려사』 권7, 문종 10년[1056년] 10월 기유[1일] : 일본국(日本國)에서 사신 정상위권예(正上位權隷) 등원조신뢰충(藤原朝臣賴忠) 등 30인이 금주(金州) 관(館)으로 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2, 경상도 김해도호부 산천(山川)조 : 명월산은 김해부의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산 아래 구량촌(仇良村)에는 견조암(見助岩) 수참(水站)이 있어서 왜의 사신을 접대한다. 산의 꼭대기 돌 틈에 구멍이 있어 출입문이 되었는데 높이와 너비는 모두 5척 정도였으며 깊이는 7척 가량이었다. 위 아래와 사방이 편평하고 반듯하였다.

[변천]

금주객관은 1049년(문종 3) 이전에 설치되었으며, 1078년(문종 32) 동남해도부서 본영이 금주로 오면서 조직과 관리가 강화되었다. 1268년(원종 9) 대일 외교가 단절됨으로써 금주객관의 활동 또한 중단된 것으로 보이며, 동남해도부서는 1376년(우왕 2) 경주로 옮겨졌다.

[의의와 평가]

다른 객관과 달리 금주객관은 11세기 초 대일 외교를 전담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며, 이는 당시 금주객관의 위상과 성격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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