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336
한자 金州道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배상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폐지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 금주도 폐지

[정의]

고려 시대 경상남도 김해 지역을 중심축으로 형성되었던 역로망.

[개설]

금주도(金州道)는 고려 시대 22개 역도(驛道) 가운데 하나였다. 금주(金州)를 중심으로 낙동강 하류 지역인 창원·함안·밀양·청도·현풍·언양·울산·양산·동래를 연결하였다. 금주도의 역로망(驛路網)은 동쪽으로 경주도(慶州道), 북쪽으로 경산부도(京山府道), 서쪽으로는 산남도(山南道)와 연결되었다. 금주도는 1895년 전통적인 역제(驛制)가 폐지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제정 경위 및 목적]

통일 신라에서 고려로 왕조가 교체됨에 따라 전국 역도망(驛道網)의 중심이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으로 변경되었다. 고려조 역제(驛制)의 변화는 성종 연간[981~997년]에 시작되어 현종 연간[1010~1031년]에 개별 역도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가 단행되었으며, 현종 말엽 전국 단위의 육상 교통망인 22역도 체계가 성립되었다. 금주도는 22역도체계의 성립과 함께 설치되었다.

[관련 기록]

『고려사』 권82, 병지2 참역(站驛)조에, “금주도는 31개의 역을 관장한다. 덕산(德山)·성잉(省仍)·적정(赤頂)·금곡(金谷)·대역(大驛)은 금주(金州)에 속하며, 영포(靈浦)·창인(昌仁)은 칠원(七元), 자여(自如)는 의안(義安), 번곡(繁谷)은 함안(咸安), 근주(近珠)는 합포(合浦), 무을이(無乙伊)·영안(永安)·용가(用家)는 밀성(密城), 내야(內也)는 창녕(昌寧), 성을현(省乙峴)·유천(楡川)·서지(西之)·매전(買田)은 청도(淸道), 병산(竝山)은 현풍(玄風), 일문(一門)은 계성(桂城), 온정(溫井)은 영산(靈山), 양주역(梁州驛)·황산(黃山)·원포(源浦)·위천(渭川)은 양주(梁州), 소산(蘇山)은 동래(東萊), 아등량(阿等良)·기장역(機長驛)·굴화(屈火)·간곡(肝谷)은 울주(蔚州), 덕천(德川)은 언양(彦陽)에 각각 소재한다.”라고 하였다.

[내용]

고려 시대 금주에는 여러 방면으로 역로망이 구축되어 있었으며, 그 중심에 금주도가 자리하였다. 금주도 소속의 31개 역을 소재지별로 일별하면 다음과 같다. 중심 고을인 금주에는 덕산역(德山驛)·성잉역(省仍驛)·적정역(赤頂驛)·금곡역(金谷驛)·대역(大驛)이 위치하였다. 이 가운데 대역은 태역(太驛)으로도 불리는 중심역이었다. 영포역(靈浦驛)·창인역(昌仁驛)은 칠원현(漆園縣)[칠원현(七元縣)]에 위치하였으며, 자여역(自如驛)은 의안군(義安郡), 번곡역(繁谷驛)은 함안군(咸安郡), 근주역(近珠驛)은 합포현(合浦縣)에 위치하였다. 무을이역(無乙伊驛)·영안역(永安驛)·용가역(用家驛)은 밀성군(密城郡)에, 내야역(內也驛)은 창녕군(昌寧郡), 성을현역(省乙峴驛)·유천역(楡川驛)·서지역(西之驛)[서지역(西芝驛)]·매전역(買田驛)은 청도군(淸道郡)에 속하였다. 병산역(竝山驛)은 현풍현(玄豐縣)[현풍현(玄風縣)], 일문역(一門驛)은 계성현(桂城縣), 온정역(溫井驛)은 영산현(靈山縣)에 위치하였다. 양주역(梁州驛)·황산역(黃山驛)·원포역(源浦驛)·위천역(渭川驛)은 양주(梁州)에, 아등량역(阿等良驛)·기장역(機長驛)·굴화역(屈火驛)·간곡역(肝谷驛)은 울주(蔚州)에, 덕천역(德川驛)은 언양현(彦陽縣)[헌양현(巘陽縣)]에, 소산역(蘇山驛)은 동래현(東萊縣)에 위치하였다.

[변천]

금주도의 속역들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 적정역이 적항역(赤項驛)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소속 역이 자여도(自如道) 등으로 분화되는 등 변천을 거듭하였고 1895년 전통적인 역제가 폐지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금주도에는 31개 역이 소속되어 있었다. 고려 시대 역도별 평균 역의 수가 24개였음을 감안하면, 역제에서 차지하는 금주도의 비중을 알려준다. 금주도는 소속 역이 멸포·태산진·가야진·황산진 등 낙동강 주요 나루와도 연결되고 있어 육운(陸運)과 수운(水運)이 교차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육로를 통한 인적·물적 유통 뿐만 아니라, 낙동강과 바다를 통하여 전국 각지와도 연결이 가능하였던 교통로였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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