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348
한자 烽燧制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성우

[정의]

조선 시대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긴급한 상황을 횃불과 연기로써 중앙에 전달하였던 통신 제도.

[개설]

한국 봉수는 삼국 시대부터 지명이나 왕명을 통해 봉수 운영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제도화된 봉수는 고려 시대부터였다고 보이고, 고려 봉수의 운영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곳이 김해이다.

『포은집』의 「김해산성기」에는 '장차 김해의 백성들로 하여금 평상시에 일이 없을 때면 산을 내려와서 밭을 갈고 바다에 들어가서 고기를 잡다가 봉수가 타오르는 것을 보게 되면 처자식을 거두어 성으로 들어가게 한다면 베개를 높이 베고서 편안히 누울 수 있을 것이니, 누가 요새를 설치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는 것을 졸렬한 계책이라 하겠는가'라고 하여 봉수를 언급하였다.

「김해산성기」는 고려 우왕 원년인 1375년에 정몽주가 김해부사로 제수되었을 때 기록한 내용이었다. 김해에 있는 산성에 관한 사정을 기록하면서, 봉수와 산성의 효용성을 높이 평가하였고 산성입보의 장점을 역설하였다. 이 때 언급한 산성이 분산성이고, 봉수는 타고암봉수였다. 김해 지역 백성들은 일을 하다 봉수가 타오르면 성으로 들어가 피신하였고, 고려 말까지도 김해 지역 봉수는 잘 운영되고 있었다.

[관련 기록]

봉수는 기능에 따라 경봉수, 연변봉수, 내지봉수로 구분된다. 김해 지역 봉수는 해안 최일선에 위치하는 연변봉수였고, 조선 초기부터 말기까지 기록이 나타난다. 『경상도지리지』[1425년]에는 가덕도응암연대·성화야연대·고암·자암산·가덕도응암봉수 등 5곳,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는 가덕도응암·성화야·타고암·자암산·사화랑산·고산봉수 등 6곳, 『경상도속찬지리지』[1469년]에는 성화야·산성·자암봉수 3곳,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는 분산·성화예산봉수·자암산봉수 3곳, 『동국여지지』[1656년]에는 분산·성화예산·자암산봉수 3곳, 『여지도서』[1760년]에는 분산·성화예산·자암산봉수 3곳, 『대동지지』에는 성화야·산성·자암산봉수 3곳, 『교남지』[1939년]에는 분산·성화예산·자암산봉수 3곳이 기록되어 있다.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 발간 당시의 봉수는 5곳과 6곳이 있었으나, 『경상도속찬지리지』가 발간되는 15세기 중엽부터는 3곳으로 고정화되어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현재 분산성과 자암봉수는 김해 지역에 속해 있으나, 성화예산봉수는 부산 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김해 지역 봉수 노선은 조선 시대 5개 봉수 노선 중 제 2로의 간봉 노선에 해당한다. 제2로 간봉 8노선인 천성보로(天城堡路)는 천성보봉수에서 초기하여 성화예산봉수를 지나 김해 지역의 분산성→자암봉수를 거쳐 밀양의 백산→남산→성황봉수로 전달되었다.

[내용]

김해 지역에 소속된 봉수는 분산성봉수와 자암봉수 2곳이다. 분산성봉수(盆山城烽燧)는 명칭의 변화가 있었다. 조선 전기에는 일시 고암봉화(鼓巖烽火), 타고암봉화(打鼓巖烽火) 등으로 표기되었다. 이후 발간된 지지류의 책에는 봉수가 분산성 내에 위치하여 산성봉화(山城烽火), 분산봉수(盆山烽燧) 등으로 표기 변화가 있었다.

분산성봉수가 처음 만들어진 시기는 알 수 없다. 1377년(고려 우왕 3) 박위가 왜구를 막기 위해 분산성을 보수한 뒤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고, 1871년(고종 8) 정현석 부사가 개축하였다. 현재 분산성의 남쪽 만장대(萬丈臺) 위에 분산성봉수가 복원되어 있다. 석축 원형의 연대와 주위 방호벽 및 연대로 오르기 위한 계단 형태이나, 고증을 통한 복원이 아니므로 원래 형태를 알 수는 없다.

자암봉수(子菴烽燧)는 2015년 학술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 조사 결과, 연대와 추정 건물지가 조사되었다. 연대의 평면 형태는 원형이며, 단면은 ‘凸’자형으로 추정되었다. 연대로 오르는 오름 시설도 일부 관찰되었다. 건물지는 연대 북쪽 하단부에서 확인되었다. 고래 시설로 추정되는 석렬 일부가 발견되었고 연대 축조에 사용된 석재와 재질이 동일하여 같은 시기에 사용된 유구로 판단되었다. 현재 연대가 복원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천성보봉수에서 초기한 제2로 간봉 8노선은 김해, 밀양, 청도, 대구, 경산을 거쳐 직봉과 연결되었는데, 김해 지역 분산성과 자암봉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김해 지역 봉수는 남해 연안에 위치하여 왜구 침입 시 신속하게 중앙에 알리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