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노동야학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395
한자 金海勞動夜學會
이칭/별칭 김해야학회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전성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1년 9월 20일연표보기 - 김해노동야학회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30년 12월 8일연표보기 - 김해노동야학회 해산
성격 야학
설립자 천도교청년회 김해지회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있었던 야학회.

[설립 목적]

김해노동야학회는 김해 지역 일반 노동자 및 점원에게 생활상 필요한 지식을 교수하는 한편, 공사립 보통학교 졸업자로서 중등학교에 취학하기 어려운 사람의 학식을 증진할 목적으로 개설되었다.

[변천]

김해노동야학회는 1921년 9월 20일 천도교청년회 김해지회에서 설립하였다. 1923년 7월 인동철, 배종철 등이 창립한 사회 노동자 운동 단체인 제사회(第四會)가 인수 경영하여 1923년 9월 9일 다시 개학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지속하지 못하고 두 달 뒤인 11월 동정, 답곡, 북내의 3개 노동단이 인수하였다. 하지만 강사의 불온을 빌미로 운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1924년 김해노농연합회가 인수하여 경영하게 되었다. 1926년 3월 이후 김해노농연합회가 분화되어 김해농민연맹으로 전환하자 김해농민연맹이 야학회를 운영하였다.

그런데 사립학교 취체령과 경영자 및 강사의 불온을 이유로 1929년 6월 8일 일제는 김해면을 통해 허가 신청서를 반환하였다. 김해농민연맹은 계속해서 야학을 운영하는 한편, 허가 신청서를 재차 제출하는 등 야학 유지를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재차 신청한 허가 신청서의 반환과 함께 1930년 9월 17일 김해면을 통해 도지사가 폐쇄 명령을 내렸다. 김해농민연맹은 경상남도와 협상에 들어가는 한편, 야학을 계속 운영하였다. 김해군에서 김해 유지들을 통해 인수하려고 획책하였지만, 김해농민연맹이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야학을 운영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강제 해산에 착수하였다. 1930년 12월 1일부터 7일까지 학생 해산과 교사 연행, 그에 따른 석방 시위가 거듭 전개된 끝에 12월 8일 결국 자진 해산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김해노동야학회는 1921년 김해공립보통학교[현 김해동광초등학교] 교사를 빌려 개학하였으며, 학급은 3학급으로 나누었다. 갑·을은 주로 노동자, 특별반은 보통학교 졸업자로 구성되었다. 강사는 모두 명예직으로 최원호, 노백용, 박종한, 안효구, 장홍율, 윤병인, 박기홍과 일본어와 산술을 가르친 일본인 이노우에[井上嘉六]로 구성되었다. 교과 과목은 수신, 역사, 상업 요항, 경제 대요, 일어, 산술, 조선어 및 한문, 이과, 농업, 습자, 작문, 지리, 창가, 부기, 산출 등이었다. 가장 중요한 과목은 노백용과 박종한이 담당한 조선어와 한문으로, 야학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잘 드러내었다.

1923년 6월 25일 제1회 졸업식, 1924년 7월 19일 제2회 졸업식, 1925년 6월 27일 제3회 졸업식, 1926년 7월 5일 제4회 졸업식, 1927년 7월 7일 제5회 졸업식, 1928년 6월 25일 제6회 졸업식, 1929년 6월 29일 제7회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의의와 평가]

김해노동야학회의 활동은 단순한 문맹 퇴치나 문명의 수입에 그치지 않고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의 각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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