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학생 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409
한자 1930年 學生 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전성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30년 1월 22일 - 진영공립보통학교 학생 만세 시위 및 동맹 휴학 계획
전개 시기/일시 1930년 2월 1일 - 김해공립농업학교·김해공립보통학교 학생 만세 시위 전개
성격 학생 운동

[정의]

1930년 광주학생운동의 흐름 속에서 진행된 경상남도 김해 지역 학생들의 항일 운동.

[역사적 배경]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고 조선인을 일본에 충성하는 식민지민[신민]으로 양성하기 위한 노예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이 식민지 노예 교육은 기본적으로 한일 학생 간의 다양한 차별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민족 차별은 교육의 장은 물론이고 현실에서 다양한 사건 사고를 불러일으켰다. 그 가운데 대대적인 조선인 학생들의 저항을 촉발한 것이 광주학생운동이었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하는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한일 학생들 간의 갈등을 조선인 학생 문제로 치부하여 버린 차별적인 식민 권력에 저항하는 운동이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동행 휴학과 만세 시위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는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며, 해를 넘어서까지 진행되었다.

[경과]

1929년 11월부터 시작된 광주, 목포, 나주 지역의 학생 운동은 12월 서울 지역 학생들의 동맹 휴학과 만세 시위로 이어졌고, 1930년 1월부터 3월까지 전국적인 동맹 휴학과 만세 시위로 확대되었다. 김해 지역에서도 1930년 1월부터 본격적인 동맹 휴학과 만세 시위가 계획되었다. 1월 22일 진영공립보통학교[현 진영대창초등학교] 6학년이 주축이 되어 만세 시위와 동맹 휴학을 계획하였다. 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추진이 중단되었다. 1월 23일에는 김해공립보통학교[현 김해동광초등학교]에서도 만세를 부르며 동맹 휴학을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

2월 1일, 김해공립농업학교[현 김해생명과학고등학교]와 김해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연합하여 다시 운동을 전개하였다. 교외로 나서 인근의 사립 합성학교[현 김해합성초등학교] 앞까지 진출하여 만세 시위를 전개하며 동참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일본 경찰이 제지하여 더 이상 시위를 전개하지 못하였다. 이날 학생 77명이 검속되었다. 다시 2월 2일에는 김해공립농업학교 3학년 3명이 검거되었는데, 학생 동정 맹휴를 시도하였다. 2월 1일의 학생 시위에 동참하지 못한 사립 합성학교는 2월 3일 다시 김해공립보통학교 학생들과 연합 만세 시위를 추진하였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2월 6일에는 김해공립농업학교 조회 시간에 학생들이 만세를 고창하였으며, 2월 20일에는 김해공립농업학교를 비롯한 학교 및 읍내에 격문 1천여 장이 살포되었다.

[의의와 평가]

1930년 김해 지역 학생 운동은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전국적 지지와 연대의 와중에 전개되었으며, 일제의 ‘충량한 신민 만들기’ 노예 교육과 민족 차별 정책에 저항한 일제 강점기 대표적 학생 항일 운동 중 하나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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