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6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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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化 柳氏 |
영어공식명칭 | Munhwa Ryoossi|Munhwa Ryoo Clan |
이칭/별칭 | 문화 유씨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장경준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470년 - 류용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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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533년 - 류용 사망 |
본관 | 문화 류씨 본관 - 황해도 유주 |
입향지 | 문화 류씨 입향지 - 경상남도 김해시 외동 |
세거|집성지 | 문화 류씨 세거지 - 경상남도 김해시 외동 |
묘소|세장지 | 문화 류씨 세장지 -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원지리 |
성씨 시조 | 류차달 |
입향 시조 | 류용 |
[정의]
류차달을 시조로 하고 류용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김해시의 세거 성씨.
[개설]
문화 류씨(文化 柳氏)는 황해도 유주[문화현]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류차달(柳車達)을 시조로 한다. 류차달은 태조(太祖)가 남방을 정벌할 때 수레를 내어 군량을 제공함으로써 대승(大丞)에 제수되었다. 이후 5세손 류공권(柳公權) 이후 여럿이 증시(贈諡)를 받아 고려 왕조에서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졌다. 문화 류씨 족보인 『영락보(永樂譜)』[1423], 『가정보(嘉靖譜)』[1562]는 우리나라 족보의 효시로서 계보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연원]
류차달의 7세손인 문간공(文簡公) 류공권이 고려 명종(明宗) 때 정당문학(正堂文學)과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지내고 문장과 글씨로 이름을 떨쳤다. 8세인 류언침(柳彦琛)과 류택(柳澤) 대에 두 갈래로 갈라져 지금 문화 류씨의 양대 산맥을 이루며 14개 파[유언침계 6개 파, 유택계 8개파]를 형성하였다. 문화 류씨는 고려에 이어 조선에서도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대과(大科) 급제자 134인, 정승(政丞) 9인, 호당(湖當) 5인, 청백리(淸白吏) 4인, 공신(功臣) 11인을 배출하였다.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가 지은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는 동한(東漢) 명벌(名閥) 20개의 성(姓) 중 류씨가 9위로 기록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고려 사인에 명망 있는 씨족과 높은 재상으로는 류·최·김·이 4성이 귀종(貴種)이다.”라고 하여 고려 명족 중 류씨를 으뜸으로 꼽았다.
[입향 경위]
김해 지역 문화 류씨는 좌의정을 지낸 류만수(柳曼殊)를 파조(派祖)로 하는 좌상공파(左相公派)의 후손들이다. 류만수의 아들 류백손(柳伯孫)은 도호부사(都護府使)를, 손자 류용(柳墉)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냈는데, 류용이 김해 거인리[현 김해시 외동]로 이주하여 문화 류씨 김해 입향조가 되었다. 류용의 아들은 류서종으로 경산현령을 지냈으며, 손자는 낙오(樂吾) 류식(柳湜)으로 임진왜란 때 송빈(宋賓), 이대형(李大亨), 김득기(金得器)와 함께 김해성을 지키다가 순절하였다.
[현황]
류용의 후손들이 김해시 외동에서 세거하고 있다. 2015년 통계청의 ‘인구 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김해시에 거주하는 문화 류씨는 1,647명으로 전체 류씨(柳氏) 2,423명의 절반을 넘는 것으로 나온다.
[관련 유적]
김해시 외동에 문화 류씨 세적비가 있다. 류용이 입향 후에 자리를 잡으면서 심었다는 은행나무도 있는데, 현재 김해시의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순국한 류식을 추모하는 제실인 낙오정이 김해시 진례면 청천리 다곡마을에 있다. 류식이 결사 항전을 위하여 지팡이를 꽂아 우물물이 솟아 오르게 했다는 자리도 김해 시내 동상시장 안에 ‘류공정(柳公井)’이란 이름으로 비와 함께 남아 있다. 김해시 가야로405번안길 22-9[동상동 161]에 류식, 송빈, 이대형, 김득기를 배향한 송담서원(松潭書院)이 있다. 송담서원[송담사]은 1708년(숙종 34) 지방 사림이 건립하였으며, 1833년(순조 33) ‘표충사’라 사액을 받았다. 1871년(고종 8) 사충단(四忠壇)을 건립하고 임진왜란 때 순절한 류식, 이대형, 송빈, 김득기 등 사충신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