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645
한자 金普
영어공식명칭 Gim Bo
이칭/별칭 죽강(竹岡),충간(忠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341년 - 김보 원나라 입조
활동 시기/일시 1352년 6월 1일 - 김보 일등상공신 녹훈
활동 시기/일시 1356년 - 김보 가라산 유배
활동 시기/일시 1365년 6월 - 김보 수도첨의시중 제수
묘소|단소 김보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도유리 산100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김해
대표 관직 수도첨의시중

[정의]

고려 후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문신.

[가계]

김보(金普)의 본관은 김해이다. 호는 죽강(竹岡)이고,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상장군을 지낸 김익섬(金益銛)으로 전하고, 할아버지는 대제학을 역임하였다는 김주국(金柱國)이며, 아버지는 김해 김씨 김녕군파 파조인 김목경(金牧卿)이다. 김보는 낙안 김씨 김남정(金南正)의 딸과 결혼하여 김도문(金到門)·김달문(金達門)·김현문(金顯門)·김창문(金昌門) 등 4남 2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김보의 활동은 1340년대부터 확인된다. 1341년(충혜왕 복위2) 5월 29일 원나라 황실에서 사신을 보내 왕의 동생인 강릉대군(江陵大君) 왕기(王祺)[공민왕]를 소환하여 입조하도록 하였다. 이때 정승 채하중(蔡河中)과 전 첨의평리 손기(孫琦), 박인간(朴仁幹) 등 30여 명이 강릉대군을 모시고 원나라로 들어갔는데, 김보도 시종신의 대열에 포함되어 있었다.

10년간 시종신으로서 원나라 대도에서 활동하다 공민왕과 함께 귀국한 김보에게는 공민왕의 즉위가 튼튼한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1351년(공민왕 즉위년) 11월 인사에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임명되었고, 1352년 6월에는 첨의평리(僉議評理)를 맡고 있었다. 또, 1352년 6월 1일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 37명을 4등급으로 녹훈하였는데, 김보는 1등상공신 6명 가운데 1명이었다. 이때 왕실 재정을 관장하는 의성창(義成倉)과 덕천창(德泉倉)의 제조(提調)도 겸하였다. 이처럼 공민왕 즉위 초부터 재상급 벼슬을 역임하고 수종공신호까지 받으면서 권력층으로 부상하자, 이를 꺼려한 김용(金鏞)의 견제로 모친상을 당하였을 때 억지로 삼년상을 치르게 되면서 벼슬길이 막혔던 적도 있다.

1356년 반원 정책의 추진은 김보에게도 타격을 주었다. 1354년 12월 김보가 하정사(賀正使)로 원나라에 들어갈 때 찬성사로 승진하고 김녕부원군(金寧府院君)으로 책봉되었지만, 1356년 5월 기철(奇轍) 세력이 숙청되면서 기철의 당여로 체포되어 가라산(加羅山)에 유배되었다. 이후 10년 가까이 벼슬하지 못하다가 1365년(공민왕 14) 5월 신돈(辛旽)이 집권하면서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로 발탁되어 정계에 복귀하였다. 한 달 뒤에는 수상직인 수도첨의시중(守都僉議侍中)이 되고, 충근양절동덕보리공신(忠勤亮節同德輔理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그러나 신돈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공민왕이 신돈의 편을 들면서 김보는 임명된 지 3개월 만에 파직을 당하였다.

[묘소]

김보의 무덤은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도유리 산100번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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