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6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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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庾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신은제 |
[정의]
고려 후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무신.
[활동 사항]
김유(金庾)[?~1386]의 본관은 김해이다. 1362년(공민왕 11) 강릉도병마사(江陵道兵馬使)로 홍건적을 평정하고 개경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이등공신에 책봉되었다. 이후 공민왕의 명으로 김득배(金得培)를 처형하였고, 김용(金鏞)이 일으킨 흥왕사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책봉되었다. 곧이어 원나라에 사신을 갔는데, 원나라에서 덕흥군 타스테무르[塔思帖木兒]를 고려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김유는 따르지 않았다. 이후 귀국하여 밀직부사로 임명되었고, 추성익조공신(推誠翊祚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우왕이 즉위한 뒤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임명되었으며, 김해군(金海君)에 봉하여졌다.
1379년(우왕 5) 4월 연안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으나, 9월에 우왕의 유모 장씨(張氏)를 유배 보낼 때 최영을 질책하였다가 합포로 유배되었다. 1381년(우왕 7)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어 명나라로 떠났는데, 요동에서 되돌아왔다. 1382년에 다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명나라에 갔으나 역시 요동에서 막혔다. 1383년(우왕 9년)에는 해로를 이용하여 명나라에 갔으나, 기일을 맞추지 못하여 명 태조에 의해 대리(大理) 지역으로 유배되었다. 1386년(우왕 12)에 고려로 돌아와 우왕에게 안장을 갖춘 말을 하사받았다. 이후 이인임(李仁任)의 미움을 받아 청주로 유배되었다가 잠시 풀려났다. 하지만 다시 곤장을 맞고 가산을 몰수당하였으며, 순천부로 유배 가던 중 경천역(敬天驛)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