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647
한자 朴葳
영어공식명칭 Park Wi
이칭/별칭 충의백(忠義伯)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377년 - 박위 김해부사 부임
몰년 시기/일시 1398년연표보기 - 박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22년 - 박위 신남서원 배향
부임|활동지 김해부 - 경상남도 김해시
사당|배향지 신남서원 -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판정로 125-13[정곡리 74]
성격 무신
성별
본관 밀양
대표 관직 문하평리

[정의]

고려 후기 경상남도 김해에서 활동한 무신.

[가계]

박위(朴葳)[?~1398]의 할아버지는 전법판서를 지냈다는 박천명(朴天命)이고, 아버지는 충목왕 대 정치도감(整治都監)의 정치관이었던 박광후(朴光厚)이다. 어머니는 찬성사를 지낸 안동 김씨 김영휘(金永暉)의 딸이다. 박위파평 윤씨 윤리(尹莅)의 딸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판사 박기(朴耆)이고, 맏딸은 문화 류씨 병마사 류연지(柳衍之), 둘째 딸은 창녕 성씨 참찬 성발도(成發道)와 각각 혼인하였다.

[활동 사항]

박위는 공민왕 때 우다치[亏達赤] 소속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우왕 때는 주로 지방관으로 왜구 토벌에 힘썼다. 우왕 대 김해 지역의 왜구 침탈은 심각하였는데, 1375년(우왕 1) 11월의 왜구 침입으로 김해 지역의 관아와 성곽이 모두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 1377년 3월에 접어들어 남해 연안 지역에 대한 왜구의 공세는 더욱 강화되고 있었다. 왜구는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뒤덮어 돛과 돛대가 이어질 정도로 대선단을 이끌고 남해 연안 지역을 공격해 왔다. 왜구는 1377년 4월 울주와 김해를 공격하는데, 김해부사 박위는 황산강 어귀에서 29급을 베는 한편, 많은 수의 왜구를 강에 빠져 죽게 하는 전과를 올렸다.

박위의 왜구 토벌은 1377년 5월의 황산강전투에서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다. 왜구는 김해 남쪽 포구에 50척의 선단을 정박시켜 놓고서 황산강을 거슬러 올라 밀양을 공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박위는 왜구의 계획을 미리 입수하여 황산강 양 언덕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수군 30척을 거느려 기다리고 있다가 왜선이 강어귀로 들어오자 일제히 공격하여 섬멸시켰다. 왜구 토벌에 대한 박위의 활약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는데, 1389년 8월에는 경상도 도절제사의 지위로 왜선 1척을 사로잡고, 32급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박위는 왜구의 근거지로 지목된 대마도 정벌을 주도하였다. 1389년(창왕 1) 2월 박위는 전함 100척을 거느리고 대마도 공략에 나서, 왜구의 선박 300척을 불사른 다음, 상륙하여 왜구의 막사를 모두 불살라 없애 버리고, 포로가 되었던 고려인 남녀 100여 명을 되찾아 돌아오는 성과를 거두었다. 창왕은 승전하여 돌아온 박위 등에게 의복과 안장 갖춘 말, 은정(銀錠)을 하사하고 교서를 내려 치하하였다.

[상훈과 추모]

박위는 위화도회군 공신으로 공양왕의 옹립에 참여하여 충의군(忠義君)으로 봉하여졌으며, 공신녹권을 받았다. 1822년(순조 22) 박성기(朴聖基) 등 밀양 사림들이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정곡리에 신남서원(莘南書院)을 세우고, 박기(朴耆)와 함께 배향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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