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663
한자 李學逵
영어공식명칭 Lee Hakkyu
이칭/별칭 성수(醒叟),성수(惺叟),낙하생(洛下生),낙하(洛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상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70년연표보기 - 이학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01년 - 이학규 능주 유배
활동 시기/일시 1801년 - 이학규 김해부 이배
활동 시기/일시 1824년 - 이학규 해배
몰년 시기/일시 1835년연표보기 - 이학규 사망
출생지 황화방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성격 문인
성별
본관 평창

[정의]

조선 후기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유배된 문인.

[가계]

이학규(李學逵)[1770~1835]의 본관은 평창이다. 자는 성수(醒叟) 또는 성수(惺叟)이고, 호는 낙하생(洛下生) 또는 낙하(洛下)이다. 아버지는 이응훈(李應薰)이고, 어머니는 진사 이용휴(李用休)의 딸 여주 이씨이다. 외삼촌은 이가환(李家煥)이고, 외종형은 황사영(黃嗣永)이다. 아들은 이재종(李在種)·이재목(李在牧)이고, 딸은 각각 윤태서(尹泰舒), 권척(權拓)에게 출가하였다.

[활동 사항]

이학규는 1770년(영조 46) 서울 황화방(皇華坊)[현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의 외가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외할아버지인 이용휴에게 글을 배웠다. 약관의 나이에 글재주로 이름을 떨쳐 정조의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벼슬이 없는 선비로서 『규장전운(奎章全韻)』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왕명에 의해 원자궁(元子宮)에 내릴 책을 교감하고, 수정 및 보완하여 바쳤다. 또한 이만수(李晩秀)가 지은 「화성경리시말(華城經理始末)」을 한글로 번역하여 바쳤으며, 「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櫂歌)」를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 때 천주교와 무관함이 밝혀졌으나, 전라도 능주(綾州)[현 전라남도 화순군]로 유배되었다. 1801년 외종형 황사영의 백서사건(帛書事件)이 발생하자 김해로 유배지를 옮기게 된다. 이후 1824년(순조 24) 아들인 이재종의 소청으로 방면될 때까지 김해에서 24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이학규는 유배 기간의 생활 체험에 기초하여 김해 지역 민간 풍속과 지역민의 생활상을 밀도 있게 형상화한 다수의 시편을 창작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김해에 내왕하며 지역 문사 및 중인층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학규의 활동은 김해 지역의 문화 의식과 수준 향상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1835년(헌종 1) 충주에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학규의 저서로는 친필로 보이는 필사본 『낙하생고(洛下生藁)』와 다른 필체로 옮겨 적은 것 등을 합하여 20여 책이 있다. 1985년 한국한문학연구회에서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고를 수합하여 『낙하생전집』 3권을 영인 발간하였다. 『낙하생전집』에는 이학규의 시 400여 수와 척독(尺牘) 20여 수를 모은 시문집인 『인수옥집(因樹屋集)』이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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