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무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668
한자 魚無迹
영어공식명칭 Eo Mujeok
이칭/별칭 잠부(潛夫),낭선(浪仙)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백지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501년 - 어무적 신유상소 작성
성격 문인
성별
본관 함종

[정의]

조선 전기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활동한 문인.

[개설]

어무적(魚無迹)의 본관은 함종이다. 자는 잠부(潛夫)이고, 호는 낭선(浪仙)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어연(魚淵)이고, 할아버지는 어변문(魚變文)이며, 아버지는 어효량(魚孝良)이다. 아들로 어석(漁碩)을 두었다. 어무적은 얼자로, 양반 중심 조선 사회에서 신분적 한계를 지닌 인물이었다. 하지만 『속동문선』·『국조시산』 등의 국내 시선집은 물론, 중국의 『명시종(明詩綜)』에까지 작품이 수록되는 등 문예적 재능은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었다.

[활동 사항]

어무적은 조선 성종·연산군 때 인물로, 『국조시산(國朝詩刪)』 등에 김해가 거주지로 표기되어 있다. 아버지 어효량은 양반이었으나, 어머니가 관노였으므로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신분은 노비였다. 허균의 『국조시산』에 “관노로 면천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후에 면천된 것으로 추정된다. 어무적은 얼자이기 때문에 과거에 응시하지는 못하였지만, 아버지에게서 한시를 배운 것으로 보인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절을 지날 때 산에서 구름을 나오는 것을 보고 “청산경객지(靑山敬客至)[푸른 산이 오는 손님을 공경하여], 두재백운관(頭戴白雲冠)[머리에 백운관을 썼다]”이라는 시를 지은 일화가 전한다.

1501년(연산군 7) 김해 지역 백성이 겪던 어려운 사정을 밝힌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어무적의 직은 율려습독관(律呂習讀官)이었는데, 장악원 소속 벼슬로 서얼 등에게 주어지는 미관말직이었다. 연산군 때 일시적으로 신설되었으나 곧 폐지되었다.

어무적은 조선 시대 잡록, 시화류 등에 간단히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신분적 한계로 다양한 활동을 하지 못한 채, 작품 활동을 통해 사회를 비판하며 생애를 보낸 것으로 이해된다. 『대동야승』에 따르면 어무적이 김해부사의 수탈을 비판하는 시[「작매부(斫梅賦)」]를 썼는데, 이를 안 김해부사가 크게 화를 내자 도망쳐서 유랑하다가 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저술 및 작품]

어무적의 작품은 『속동문선』, 『국조시산』 등에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유민탄(流民嘆)」과 김해부의 공부(貢賦)를 비판한 시로 유명하다. 「유민탄」은 선조가 관료를 꾸짖을 때 “북궐매하우민조(北闕每下憂民詔)[궁궐에선 매양 백성을 걱정하는 조서 내리는데], 주현전간일허지(州縣傳看一虛紙)[주현에서는 한낱 부질없는 종이로 보네]”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유명하여졌다. 허균 또한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유민탄」을 당대의 걸작으로 평가하였다.

김해부의 공부를 비판한 시는 제목이 전하지 않는데, 근래 학자가 어무적을 연구하며 「작매부」라 가제(假題)하면서 이 제목을 쓰는 경우가 많다. 당시 김해부사가 매실나무에까지 무리한 징수를 요구하여 백성들이 견딜 수 없었는데, 한 농부가 결국 도끼로 매실나무를 찍어 내는 것을 본 어무적이 시를 통해 관리의 횡포를 비판하였다.

1501년 연산군에게 올린 신유상소(辛酉上疏)는 향락의 근절, 민생의 보호, 군주다운 자세 확립, 선비의 각성 및 언로의 창달을 간절히 바라는 글이었다. 이 밖에 「신력탄(新曆嘆)」과 오언율시 「마상봉신설(馬上逢新雪)」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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