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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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裵東奭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전성현 |
출생 시기/일시 | 1889년 3월 22일 - 배동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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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06년 - 배동석 계성중학교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08년 - 배동석 계성중학교 퇴학 |
수학 시기/일시 | 1908년 - 배동석 경신학교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10년 - 배동석 경신학교 졸업 |
수학 시기/일시 | 1918년 - 배동석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배동석 유일학교 영어 교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일 - 배동석 탑골공원 만세 시위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5일 - 배동석 남대문역 만세 시위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4월 27일 - 배동석 경성복심법원 징역 1년 선고 |
몰년 시기/일시 | 1924년 8월 29일 - 배동석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0년 - 배동석 대통령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배동석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경상남도 김해시 동상동 |
학교|수학지 | 계성중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로 35[대신동 277-1] |
학교|수학지 | 경신학교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 |
활동지 | 탑골공원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99[종로2가 38-1]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99 -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산23-1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배동석(裵東奭)[1889~1924]은 1889년 3월 22일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동상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해교회 설립자 배성두이고, 어머니는 이한나이다. 부인은 함안군 칠북면 이령교회 장로인 김세민의 첫째 딸 김복남이다.
[활동 사항]
배동석은 1906년 대구 계성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12월에 황태자 이은(李垠)[1897~1970]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의해 유학을 빙자해 일본에 인질로 잡혀가자 배일 운동에 가담하였다. 이 때문에 3개월간 옥고를 겪다가 퇴학을 조건으로 1908년에 가석방되었다. 이후 서울 경신학교[현 경신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0년 졸업하고 목포 유일학교에 영어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교사가 조선인 학생을 체벌하는 것에 항의하다가 다시 배일 혐의로 체포되어 사직하였다.
잠시 만주로 건너갔다가 돌아와서 1918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2월에 이갑성(李甲成)의 초청으로 학생 대표들과 만나 해외 독립운동 상황을 논의하였다. 1919년 2월 26일에 경상남도 민족 대표의 승인 및 추천을 위해 마산으로 파견되었으며, 마산, 함안, 김해 등지의 만세 시위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서울로 돌아와 3월 1일 탑골공원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남대문통, 의주통, 정동 미국영사관 앞, 대한문 앞, 장곡천정, 본정 종로경찰서까지 행진하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3월 5일에는 학생들의 만세 시위가 남대문역에서 전개되었는데, 그 소식을 미리 알고 아침부터 군중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과 1심을 거쳤고, 1920년 4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옥중에서 결핵에 걸려 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5년간의 투병 끝에 1924년 8월 29일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묘소]
배동석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99에 안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배동석은 1980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다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