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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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玉兼 |
영어공식명칭 | Kim Okgyeom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종순 |
출생 시기/일시 | 1892년 - 김옥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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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29일 - 김옥겸 구포장터 만세 운동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7월 16일 - 김옥겸 징역 1년 선고 |
몰년 시기/일시 | 1957년 8월 - 김옥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김옥겸 대통령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김옥겸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덕산리 |
활동지 |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김옥겸(金玉兼)[1892~1957]은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덕산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며, 독립운동가 허정(許楨)의 고모부이다.
[활동 사항]
김옥겸은 1919년 3·1운동 당시 지금의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양봉근이 고향에 내려와 구포면사무소 서기 임봉래에게 서울의 만세 운동 소식을 전하자, 김옥겸은 임봉래·유기호·허정 등과 함께 거사 계획을 세웠다. 김옥겸 등은 이수련·박영초 등의 집에서 논의를 거듭하였고, 3월 29일 구포 장날에 의거하기로 결정하였다. 거사일이 정하여지자 밤을 새워가며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수백 장씩 제작하고, 대형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를 쓴 펼침막을 만들었다.
3월 29일 구포 장날, 김옥겸과 청년들은 시장 사람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었고, 1,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김옥겸을 비롯한 12명이 체포되었고, 이에 분노한 군중은 더욱 거세게 저항하였다. 김옥겸은 7월 1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김옥겸은 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1923년 5월에 고베에서 불령선인으로 검속되었다. 1924년 귀국하여 2·8독립선언 서명자인 김철수와 교유하였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정의부(正義府)에 가담하여 만주국이 생길 때까지 6년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57년 8월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김옥겸은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부산광역시 북구에 ‘구포장터 3·1운동 기념비’[1995년]가 있다. 구포역 광장 일대에서는 매년 시민과 학생들이 참여하여 ‘구포장터3·1만세운동재현행사’가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