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734
한자 金盛得
이칭/별칭 김초웅(金初雄),금원초웅(金原初雄)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배병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23년 6월 23일연표보기 - 김성득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42년 10월 - 김성득 가와이고등보습학교 야간부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42년 11월 - 김성득 와룡회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43년 7월 31일 - 김성득 검거
활동 시기/일시 1944년 7월 29일 - 김성득 나고야지방재판소 징역 2년 6개월 선고
몰년 시기/일시 1983년 1월 16일연표보기 - 김성득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3년연표보기 - 김성득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진영리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가와이고등보습학교 -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활동지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산23-1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성득(金盛得)[1923~1983]은 1923년 6월 23일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진영리에서 태어났다. 김초웅(金初雄)으로도 불렸으며, 창씨명은 금원초웅(金原初雄)이다. 1942년 9월 도쿄 해군경리학교 건설 공사장에서 재일 조선인 삼촌충승(杉村忠勝), 암본무웅(岩本武雄) 등과 교류하였다. 김성득 등은 여러 차례 모임을 가지면서 조선 독립에 대한 의식을 키워 나갔다.

1942년 10월 김성득은 암본무웅과 나고야시[名古屋市] 가와이고등보습학교[河合高等補習學校] 야간부에 입학하였고, 새로운 동지 권오균[창씨명 太田政行]을 얻었다. 김성득은 조선인이란 이유로 차별받아 일본인에게 반감을 품게 되었고, 독립 의식을 가지고 있던 권오균을 보며 독립된 국가를 건설하는 것만이 민족의 자유와 행복을 획득하는 길이란 것을 깨달았다. 이에 암본무웅, 권오균, 고해일[창씨명 高山海日] 등과 독립운동 조직 결성에 대해 협의하였고, 1942년 11월 비밀 결사 와룡회(臥龍會)를 조직하였다.

와룡회는 회칙에 ‘조선 독립을 위하여 서로 상부상조한다’는 규정을 두고, ‘회장의 지령에 따라 일제 궐기하여 무력전을 전개’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주요 구성원들은 각자의 역할에 따라 실천 운동을 벌였는데, 김성득은 청년들의 의식을 일깨우고 동지로 끌어들이는 일을 맡았다. 와룡회는 이후 나고야 지역에서 다수의 한인 노동자와 학생을 동지로 모집하였고, 1943년 7월까지 비밀리에 조직원과 대중의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비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별다른 성과를 얻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합법적인 위장 활동을 위해 소화연진대(昭和蓮進隊)의 결성을 모색하였다. 소화연진대는 “반도 민중의 복리를 도모하여 일본과 조선에 동등한 권리를 부여할 것을 정부에 건의하고, 민족적 차별을 해소하여 명실상부한 양 민족 일체론을 도모함”을 내걸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조선의 완전 독립을 위한 조직이었다. 하지만 1943년 7월 31일 와룡회의 주도 인물들이 대거 검거되면서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김성득은 1944년 7월 29일 나고야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의 활동은 알려진 것이 없으며, 1983년 1월 16일 사망하였다.

[묘소]

김성득은 1995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김성득은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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