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7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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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盧奭鎬 |
이칭/별칭 | 조대영(曺大永)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전성현 |
출생 시기/일시 | 1916년 11월 17일 - 노석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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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42년 - 노석호 비밀 결사 조직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44년 11월 11일 - 노석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3년 - 노석호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경상남도 김해시 생림면 생철리 |
거주|이주지 | 이주지 - 대구광역시 |
활동지 | 옌안 - 중국 산시성 옌안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노석호(盧奭鎬)[1916~1944]는 1916년 11월 17일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생림면 생철리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조대영(曺大永)이다. 본관은 광주이고, 아버지는 노재우이다.
[활동 사항]
노석호는 고향 김해에서 강습소를 개설하고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5년 말 신문을 통해 만주 지안현[集安縣] 이재 동포의 참상을 확인하고, 조기환·허영이 등과 마을에서 구제금 8원 50전을 모아 조선중앙일보 삼랑진지국에 전달하였다. 또, 일본 오사카[大阪] 동포들이 대홍수로 피해를 입은 생림면 이재민에게 사용해 달라고 보내온 구호품을 배급하기도 하였다.
노석호는 일제 말기에 대구로 거처를 옮겼다가 대구에서 친분을 쌓은 박진목(朴進穆)의 양조장에서 생활하였으며, 박진목의 형인 박시목(朴時穆)과도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박시목은 1921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독립사상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고, 1927년에는 신간회 도쿄지회 창립에 참가하였으며, 1930년대 중반에는 대구로 들어와 광산 경영 등을 하며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인물이다. 박시목은 1940년 초에 항일 세력 대연합을 추진하기 위해 베이징[北京]으로 들어갔는데, 1942년 박진목이 베이징에서 박시목을 만나고 돌아와 노석호 등과 비밀 결사를 조직하였다.
노석호는 박시목의 셋째 아들 박희규(朴熙奎), 김창숙의 둘째 아들 김찬기와 함께 조선독립동맹이 있는 옌안[延安]으로 갔다. 1943년 초까지 옌안에서 훈련을 받은 노석호 등은 다시 펑톈[奉天]으로 파견되는데, 독립군 조직과의 연결을 위해서였던 것 같다. 하지만 노석호는 펑톈으로 가던 도중에 박희규와 함께 산해관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무렵 만주의 신징[新京]·펑톈, 국내의 서울·평양·대구 등지에서 활동하던 100여 명의 동지도 함께 체포되었다. 노석호는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신징의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1월 11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노석호는 2003년 해외 독립운동 공적을 정부로부터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경상남도 김해시 생림면 선산에는 제단이 갖춰져 있으며, 1995년 건립된 추모비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