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1376
한자 旌閭
이칭/별칭 정문,홍문
분야 종교/유교,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안순형

[정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있는 조선 시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하여 나라의 명으로 정문을 세워 표창했던 일.

[개설]

정려(旌閭)는 나라에서 미풍양속을 널리 장려하여 백성을 교화하기 위하여 충신·효자·열녀 등이 살았던 마을 어귀나 대상자의 집 대문에 붉은색 정문을 세워 표창했던 일이다. 정표(旌表)·정문·홍문(紅門) 등으로도 불렸다. 정려의 풍습은 신라 시대에 이미 시작되었고, 조선 전기부터 유교적 풍속 교화를 위한 정표정책(旌表政策)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1406년(태종 6) 윤7월 대사헌 한상경(韓尙敬) 등이 ‘시무10사’를 아뢴 이래로 역대 왕들은 각 지방에 유교적 교화의 모범이 되는 사람을 보고하도록 하고, 삼강오륜에 기반하여 엄격한 심사를 거쳐 신분의 높낮이나 남녀의 구분 없이 포상하며 전국적으로 정려를 세웠다. 조정에서는 1434년에 중국과 한국의 모범적인 충신·효자·열녀의 행실을 각각 110명씩 뽑아 글과 그림으로 『삼강행실도』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에 조선 조정에서는 유교적 통치 이념을 기반으로 국가 제체를 재정비하고, 향촌 사회의 질서를 재확립하고자 하였다. 유교적 교화를 다시 강화하기 위하여 1617년(광해군 9)에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을 각 도별로 분담하여 간행하고,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정려를 내리기도 하였다.

정려의 대상자에게는 다양한 혜택이 주어졌는데, 대상자가 관료 혹은 사족(士族)인 경우는 품계를 한 등급씩 올리는 가자(加資)를 하였고, 죄가 있는 사람에게 다시 벼슬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서용(敍用)이 이루어졌다. 더욱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조치로는 물품을 내려주는 사물(賜物)이나 요역을 감면해주는 복호(復戶) 등이 있었다. 이외에도 특별한 경우이지만 노비의 경우에는 면천(免賤)의 기회를 제공하여 신분 상승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는다는 것은 사족들에게는 가문의 최고 명예였고, 노비에게는 신분 상승의 통로였으며, 일반인에게는 무거운 요역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였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후기로 갈수록 조정에 정려를 요청하는 사례가 많아졌고, 수십 년에 걸쳐 상소가 진행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정려를 목적으로 한 결탁이 있어 정표자의 진위(眞僞)가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1895년 편찬된 『김해읍지』에는 총 19명의 정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 남성에 대한 것은 반석철(潘碩澈)·권형(權衡)·김석숭(金碩崇) 3명이고, 나머지 16명은 모두 여성이란 점이 주목된다. 19명 중에 1999년에 편찬된 『김해금석문총람』에도 수록된 인물은 8명이다.

[정려 표창의 기록]

김해 지역에서 정려와 관련해 처음으로 확인되는 기록은 『성종실록』의 권형반석철의 효행에 대한 것이다. 1470년(성종 1) 2월 7일 기사에, “경상도 관찰사 윤자(尹慈)가 김해 사람 전 사성(司成) 권형은 어려서부터 효행이 있었습니다. 등제(登第) 하여 헌납(獻納)이 되었으나, 부모가 모두 늙었으므로, 사직하고 돌아와 봉양하며 조석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조정에서 불러서 초계군수(草溪郡守)를 제수하였으나, 벼슬에 있은 지 수년 만에 또 사직하고 부모를 끝내 봉양하여 모두 80세가 되어서 죽었습니다. …… 같은 고을사람 전 주부(主簿) 반석철은 효행이 있어서 부모가 죽으니, 친히 돌과 흙을 져다가 영장(營葬)하고, 묘 옆에서 여묘살이하면서 슬픔과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상을 마치니, 매일 아침 사당에 참배하고, 출입할 때에 반드시 고하고, 삭망에 반드시 제사하며, 시물(時物)을 만나면 문득 천신(薦新)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예조에서 “정문·복호하고, 임사(任使)할 만한 사람은 이조·병조로 하여금 자급(資級)을 승진하여 녹용(錄用)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려 표창 현황]

『김해금석문총람』에는 현전하는 정려 14건이 수록되어 있는데, 18세기에 1건, 19세기에 5건, 20세기에 8건이 세워졌다. 이중에서 가장 빠른 것은 1749년 진례면 고모리에 다시 세워진 열녀 완산 이씨 정려이다. 지역적으로 진례면이 4건으로 제일 많고, 진영읍 3건, 한림면 2건, 생림면·대동면·불암동 및 예전 김해시에 속했던 부산광역시 강서구의 가락동·녹산동이 각각 1건씩이다.

김해 지역은 임진왜란김해성 전투에서 송빈·이대형·류식·김득기 등이 순국한 충절의 고장이지만 그들 각자에 대한 개별적인 정려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해금석문총람』에 조선 전기 권형·반석철 등을 포함한 효행을 표창한 7건이 수록되어 있고, 완산 이씨·성산 이씨 등을 포함한 열녀를 표창한 7건이 수록되어 있다. 이외에 『순조실록』에 1860년 조수문(曺秀文)의 처 벽진 이씨를 정려한다는 것과 함께 벽진 이씨의 계집종 숙진(淑眞)이 주인에게 충심을 다했으므로 ‘복호’의 혜택을 주었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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