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284
한자 先史
영어공식명칭 Pre-historic Period
이칭/별칭 선사시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동희

[정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의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

[개설]

선사 시대는 역사 시대와 달리 문헌 기록이 없는 시대를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개 선사 시대는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등이 포함된다.

구석기 시대는 원시 인류가 최초로 뗀석기[타제 석기]를 도구로 사용하던 시기였다. 구석기 시대에는 뗀석기 이외에도 동물뼈나 뿔로 제작한 도구인 골각기를 이용하여 수렵 채집 생활을 하였다. 구석기 시대 이른 시기에는 찍개나 주먹 도끼와 같은 큰 석기를 이용하였지만, 늦은 시기로 갈수록 작고 정밀한 세석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주거 공간은 바위 그늘이나 동굴을 주로 이용하였고, 가족이나 친족 단위로 생활하였다.

영남 지방에서는 약 50여 개소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지금까지 경상남도 지역에서 알려진 구석기 유적은 거창 정장리, 진주 평거동, 밀양 고례리, 산청 옥산리 유적 등이다. 경상남도 일대에서는 전기 유적[13만년 전 이전]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고 중기[12~14만년 전] 및 후기[4~1만년 전] 구석기 시대 유적만 조사되었다.

신석기 시대는 1만년 전에 빙하기가 끝나고 지구가 온화해지는 변화 속에서 시작되었다. 신석기 시대는 구석기 시대와 달리 간석기[마제 석기], 토기의 사용, 농경의 시작 및 정착 생활 등과 밀접히 관련되었다. 주거 공간은 동굴보다는 움집[수혈 주거지]을 지어 사용하였다. 구석기 시대에 비해 신석기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농경의 시작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이른 시기에는 농경이 확인되지 않고 구석기 시대와 비슷하게 수렵, 채집, 어로 생활이 주생업이었다. 신석기 시대 중기 이후에는 일부 지역에서 밭농사가 이루어진다. 우리나라에서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6천년 무렵에 시작되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경상남도 지역의 신석기 문화는 집자리[주거지], 무덤, 조개더미[패총] 등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경상남도 지역의 대표적인 신석기 시대 유적은 합천 봉계리, 창녕 비봉리, 사천 늑도, 산청 소남리, 진주 평거동, 통영 연대도 등이 있다. 경상남도 도서 해안 지역에는 특히 조개더미가 많이 확인되고 있다.

청동기 시대는 청동기의 제작 및 사용과 관련되는데, 한반도 중남부에서 청동기 사용의 상한은 기원전 1,000년경 혹은 조금 더 올려보기도 한다. 청동기 시대의 이른 시기에 청동기의 사용은 매우 제한적이었는데, 청동기 시대를 통괄하는 공통점은 민무늬 토기[무문 토기]의 사용이다. 청동기 시대에는 농경이 본격화되었고 부수적으로 어로와 수렵을 겸하였다. 움집[수혈 주거지]에 살고, 무덤은 고인돌[지석묘], 석관묘, 옹관묘 등이 대표적이다. 벼농사가 본격화되면서 잉여 생산물이 발생하였고 계층 분화가 이루어졌다. 계층 분화의 산물이 대규모 노동력이 동원되는 고인돌의 축조이다. 중심 취락의 방어를 위한 환호 시설도 확인되는데, 김해 지역에서는 대성동 환호가 대표적이며 4겹 이상이다. 청동기는 주로 의례 도구, 무기 등으로 사용되었고, 일상 생활 도구는 간석기가 여전히 사용되었다.

[구석기]

김해 지역에서의 구석기 유적은 매우 빈약한데, 장유동 율하 2지구 택지 개발 지구에서 구석기시대 유물 3점이 지표에서 확인된 바 있었다. 장유동 수습품은 후기 구석기시대에 해당하여, 늦어도 이 무렵에 김해 일대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유동 유적 출토 몸돌 2점 중 1점은 작은 격지를 떼어내기 위해 하나의 타면을 이용하여 박리 작업을 진행하였다. 박리 타면의 주위를 돌아가면서 박리한 것이 특징적이다. 몸돌은 자연면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전체적으로 조정하였다. 제작 기술로 보아 후기 구석기 시대의 몸돌로 파악된다. 유물의 수가 적어 유적의 정확한 성격이나 특징을 알기는 어렵다.

[신석기]

김해 지역에서 확인된 신석기 시대 유적은 예안리 유적, 율하 유적, 시산리 유적, 화목동 유적, 농소리 조개더미 등이며, 가덕도 장항 유적, 죽도 유적, 북정 유적, 범방 조개더미, 수가리 조개더미 유적 등은 과거에 김해 지역이었지만 현재는 부산 지역으로 편입된 곳이다. 김해의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지금까지 주거지로 보고된 예는 희소하다. 화목동 2호 수혈을 주거지로 보고한 바 있지만 잔존 상태가 양호하지 못하다. 분묘 유적은 범방 조개더미와 가덕도 장항 유적이 대표적이다. 범방 유적에서는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바로 묻은 예로 신전장 형태이나 다리 부분이 ‘X’자형으로 꼬여 있다. 인골의 신장은 130~140㎝, 나이는 11~12세 정도이다. 가덕도 장항 유적의 분묘는 굴장이 많아 특이하다. 장항 유적과 범방 조개더미 출토 연옥제 장신구와 조가비 팔찌는 신석기 시대 장신구의 종류와 착용 형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청동기]

김해 지역 청동기 시대 유적은 주거지보다는 고인돌이 더 많이 조사되었다. 대표적인 고인돌은 내동, 구산동, 서상동, 율하리, 무계리 유적 등인데, 대부분 청동기 시대 후기에 해당한다. 특히. 구산동 지석묘는 길이 85m 이상, 너비 19m에 달하는 대규모 묘역을 갖추고 있으며, 상석의 무게가 350톤으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이다. 대규모 묘역을 갖춘 고인돌은 상위 계층의 무덤이면서 집단의 상징물로서 지배층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의 거석 기념물이다. 김해 지역의 청동기 시대 전기 무덤은 희소한데, 율하리 유적에서 확인된 토광묘로 채문 토기가 출토되었다.

한편, 김해 지역에서 청동기 시대 전기의 주거지가 많이 확인된 곳은 어방동 유적이다. 어방동 유적은 해발 고도가 280m에 달하여 고지성 취락이다. 어방동 주거지[28기]는 평면 형태가 방형계이며 내부에 화덕 자리가 조성되어 있고 가락동식 토기와 역삼동식 토기가 출토되었다. 송국리형 주거지로 대표되는 청동기 시대 후기 주거지는 김해 지역에서 100여기가 확인되었는데 율하리 유적에서 가장 많이 확인되었다.

한편, 김해 지역에서 제사, 의례 유적은 구관동 유적이 대표적이다. 구관동 유적은 해발 71m의 독립 구릉 정상부에 위치하며, 주변을 조망하기 좋은 입지이다. 제사 행위는 거대한 바위와 그 주변에서 이루어졌는데, 주변에서 돌칼과 적색 마연 토기가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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