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2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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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銅器 時代 |
영어공식명칭 | Bronze A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임학종 |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에서 인류가 청동으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던 시기.
[개설]
김해의 청동기 시대 유적은 크게 집자리, 경작지인 논, 그리고 방어 시설인 환호, 무덤 등이 있다. 분산(盆山) 꼭대기에 있는 어방동 유적은 김해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이다. 그 외 대부분의 집자리는 청동기 시대 늦은 시기의 예이다. 마을을 감싸는 방어 시설인 환호는 경상남도김해교육지원청과 김해여자중학교 가까이에서 확인되고 있다. 논 유적도 몇 곳 알려지고 있으나 타 지역에 비해 그 예가 적다. 그러나 고인돌로 대표되는 무덤은 김해시 전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특히 무계리 광석 고인돌, 내동 고인돌이 유명하며, 덮개돌과 묘역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구산동 고인돌이 유명하다. 김해의 청동기 시대 유적은 대부분 청동기 시대 후기 혹은 초기 철기 시대에 해당하는 특징이 있다.
[청동기 시대]
인류가 처음으로 청동이라는 금속을 사용했던 시기를 이르지만, 청동기를 알기 전에 토기와 석기만을 사용했던 때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무늬 없는 토기와 석기, 청동기 사용 집단들의 문화를 통칭하여 무문토기 문화(無文土器 文化)라고 부르기도 한다. 본격적인 쌀 농사와 집락의 형성, 집단 간의 전쟁, 고인돌 등을 주요 요소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 시작은 기원전 1,500년경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청동기 시대의 종말은 기원전 3세기까지로 보는 설과 기원 전후까지로 보는 설이 팽팽하다.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 전후까지는 초기 철기 시대로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는 청동기 시대를 기원 전후까지로 보고 서술하였다.
[김해의 청동기 유적]
김해시 전 지역에 유적이 분포한다. 고 김해만에 연한 완만한 사면이나 산꼭대기에서 유적이 확인되고 있으며, 현재까지 50여 개소가 넘는다. 생활 유적으로는 집자리, 환호, 경작 유구[논] 등이 있으며, 무덤 유적으로는 고인돌, 돌널무덤, 돌뚜껑움무덤, 움무덤, 독널무덤 등이 있다.
집자리로는 분산(盆山) 정상부에 있는 어방동 유적이 대표적이다. 움의 길이가 길고 화덕 자리가 두 군데에 있는 형태로, 김해에서는 가장 빠른 청동기 시대의 대규모 집락이다. 산꼭대기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점도 특이하다. 이 외에도 산본 유적, 어방동 분산 유적 등이 비교적 이른 시기의 유적이다. 삼문리 능동 유적은 벽과 집 자리 안쪽에 여러 개의 기둥을 둔 흔적이 나와 특이하다. 안하리에서는 벽을 따라 도랑이 파여 있는 소위 울산형 집 자리가 나왔다. 집 자리가 가장 많이 확인된 유적은 율하 유적으로 51기의 집 자리가 나왔는데, 대부분 휴암리와 송국리형으로 청동기 시대 중기와 후기에 해당한다. 구산동에서는 움 한쪽에 화덕이 달린 집 자리가 많이 나왔는데, 일본 야요이[彌生] 토기와 유사한 토기가 나왔으며, 그 시기도 마지막 청동기 시대로 일부에서 말하는 초기 철기 시대에 해당하는 유적이다.
환호는 마을을 감싸는 큰 도랑을 말하는데, 경상남도김해교육지원청과 김해여자중학교, 김해건설공업고등학교 등을 두르는 최소 4중의 시설로 추정된다. 경작 유구는 구산동 96번지 유적에서 확인되었는데 수로와 보 등이 있어 논으로 추정하고 있다. 구덩이는 땅을 판 모든 것을 말하는데 저장 시설, 폐기 터, 함정, 토기 가마 등을 모두 말한다. 삼문리 1호 구덩이는 함정, 어방동 95호 구덩이는 토기 가마이며, 율하 유적에서는 솟대 시설로 추정되는 유구가 나오기도 하였다.
무덤으로는 고인돌이 대표적이다. 고인돌은 무덤방, 굄돌, 덮개돌로 이루어진 형태인데, 일반인이 고인돌로 알고 있는 거대한 돌은 덮개돌이다. 구산동, 내동, 서상동, 유하리, 율하, 무계리, 신문리, 선지리, 구지봉, 대성동, 봉황대 고인돌 등이 유명하다. 구지봉 정상과 대성동 고분군 정상에 있는 고인돌은 산정에 단독으로 만들어져 있어 특이하며, 수로왕릉 경내와 서상동에 있는 고인돌은 19세기에 만들어진 「김해부내지도(金海府內地圖)」에 시어머니 바위[姑石], 지아비 바위[夫石], 아들 바위[子石], 뜬 바위[浮石] 등으로 기록되어 있어 보는 재미가 있다. 최근에는 큰 고인돌 주변에 묘역과 같은 단(壇) 시설을 한 고인돌이 확인되고 있는데 봉황대, 구산동, 내동, 율하 고인돌이 예이다. 이런 형태는 남해안 일대에 주로 분포하는 특징이 있다. 구산동 고인돌은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묘역 시설의 너비 19m, 길이 85m가 넘으며, 덮개돌의 무게가 350여 톤이다. 김해 지역에는 약 20여 개소에서 고인돌이 확인되고 있는데, 우리나라 서북지역에서 많이 보이는 탁자식 혹은 북방식은 없다. 굄돌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발굴 조사가 적어 하부 구조나 시설을 잘 알 수 없다.
돌널무덤은 수량이 가장 많은데 고인돌 덮개돌이 없어진 하부 시설일 수도 있다. 율하와 구산동 유적에 무덤의 벽을 납작한 돌로 만든 예가 알려져 있다. 돌뚜껑움무덤은 뚜껑 돌 아래에 아무 시설 없이 구덩이만 있는 무덤으로, 주인공은 아마 나무로 된 널에 묻혔으나 나무가 썩어 흔적이 없어진 상태일 것이다. 율하, 구산동, 망덕리, 퇴래리 소업 유적 등의 예가 있다. 움무덤은 뚜껑 돌도 없고 구덩이만 남은 무덤으로 유하리, 율하, 퇴래리 소업 등에 예가 있다. 독널무덤은 토기에 인골 혹은 불에 태운 뼈를 넣어 만든 예로, 인류 보편의 무덤 양식이다. 이후 시기와는 달리 청동기 시대의 독널무덤은 옆으로 눕히는 게 아니고, 바로 세워 묻는 예가 많다. 율하에서 1기가 나왔고, 회현리 조개더미에서 나온 예는 일본 야요이식 독널이며 초기 철기 시대의 것이다.
현재까지 김해에서는 청동기 시대 가장 이른 시기의 덧띠무늬 토기를 내는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나마 이른 시기의 유적이 어방동 유적이다. 무덤 역시 전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예가 거의 없다. 주로 청동기시대 중기 혹은 후기에 해당하는 송국리 단계의 유구가 대부분이다. 율하나 구산동 고인돌과 같이 초기 철기 시대로 부르는 청동기 시대 마지막 단계로까지 이어지는 유적이 많다. 영남 지역이 전반적으로 청동기 시대 후기 이후 문화의 지체 현상이 보이지만, 재지계의 청동기 문화가 쇠퇴하고 한국식 동검 문화가 들어올 때 그 주류를 형성하는 유적은 그래도 김해가 중심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