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2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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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加耶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가야 |
집필자 | 김양훈 |
[정의]
초기 철기 시대 이후부터 562년까지 경상남도 김해시를 비롯한 남해안과 낙동강, 섬진강 유역 일대에 분포하였던 고대 정치체의 총칭.
[개설]
가야는 가라(加羅), 가라(伽羅), 가라(迦羅), 가라(呵囉), 가라(枷羅), 하라(賀羅), 가라(駕羅) 등 다양한 한자로 표기되었는데, ‘가야’라는 표기가 『삼국사기』 등 고려 시대에 간행된 사서부터 등장한 점을 보면 당대에 사용된 용어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가야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초기 기사에 주로 나오는데, 김해, 양산, 함안 등으로 각각 비정하는 견해가 있지만, 가락국에서 변화된 국명으로 보는 것이 대세이다.
[가야사 연구 동향]
가야사 연구가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연구 주제로 인정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60년대까지 가야사 연구는 한국과 일본 고대사 연구의 피동적 객체로 취급되었다. 영세하게 남아있는 가야의 기록은 후대 또는 외국인의 관점이 과도하게 투영되어 있었다. 이것을 연구자들은 문면(文面) 그대로 해석함으로써 가야사 연구는 주변의 시선에 머물고 있었다.
1970년대 이후 가야사 연구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하나의 연구 주체로 변모하였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 등의 각종 사서 전반을 검토하여 관련 사료를 새로이 해석하였고, 연구에는 비판적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삼국지』, 『진서』 등의 중국 사서와 「광개토왕릉비문」 등의 금석문이 보다 심층적으로 다루어졌다. 이와 같은 연구 방법으로 말미암아 뿔뿔이 흩어져 있었던 가야의 문헌을 한데 모아 하나의 연대기를 구성할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가야사 연구는 발전을 거듭하였고, 한국사를 넘어 세계사적 보편성을 확보하려 시도하였다. 그러나 문헌 자료의 재해석과 비판적 활용에서 삼국사 연구와 동일한 잣대가 적용되지 않았던 점, 문헌과 고고 자료의 접목 과정에서 적잖은 오류를 범했던 점 등으로 많은 한계가 노출되었다. 이 중, 가락국사 연구는 전기 가야사 연구의 중심에 있으며, 다양한 연구 성과가 제출되었다. 특히, 시기 구분, 정치적[국가적] 성격, 정치체의 내부 구조 및 변화상, 정치체 형성, 전쟁, 대외 교섭, 제의[종교]가 논의의 중심이었다.
[가야의 성립 문제]
가야의 성립 문제는 변한과 가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의견이 다양하였다. 즉, 변한의 역사를 가야사의 시간적 범주에 포함하느냐에 따라 가야사의 시작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 같은 구분은 소위 전사론(前史論), 전기론(前期論) 그리고 원사론(原史論)으로 나누어진다.
전사론은 가야사의 시작을 3세기 말~4세기 초로 설정하고, 이전의 역사는 변한사로 규정하지만, 가야는 변한에서 잉태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반면 전기론은 변한 소국의 성립을 가야사의 시작으로 보고, 변한의 역사를 가야사의 범주로 이해하였다. 전사-전기론 논쟁의 대안으로 제시된 원사론은 전기-전사론에서 모두 가야의 기원으로서 삼국 시대에 포괄된 점을 주목하여 가야 성립의 기원이 삼한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로 보아 가야사 연구는 변한과 가야의 구분 여부에 따라 서로 견해를 달리하지만, 가야의 성립에 대해서는 변한 소국의 성립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락국은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즉 기원 후 42년에 건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년은 「가락국기」의 불교적 윤색과 과장 때문에 대체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락국의 건국 기년을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통해 검증하여 신뢰할 여지가 있으며, 가락국의 형성 과정에서 유이민 집단과 수장의 활동을 묘제 변화, 목관묘 군집, 철·철기 생산, 원거리 교역 등 고고 자료의 시간적 변화상과 연계하면 기록보다 앞선 기원전 1세기 즈음에 성립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가야의 사회 발전 단계 문제]
교과서나 대중 서적에서는 가야의 사회 발전 수준이 중앙 집권화된 고대 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점을 전제로 당대의 백제와 신라보다 저급한 연맹체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회 발전 단계 문제에 대해 아직 합의가 도출되지 못하였는데, 연구자마다 관련 사료의 이해 관점을 서로 달리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반 대중이 인식하고 있는 단일 연맹체론은 가야 전기의 가락국, 가야 후기의 대가야[가라국]가 맹주국이 되어 가야 지역이 하나의 연맹을 이룬 것이라는 견해이다. 그러나 후대의 관념에 의해 편의적으로 사용된 ‘가야’의 틀 속에서 동질적인 사회 성격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것의 대안으로 제시된 지역 연맹체론은 유력국들이 포괄하는 문헌적, 고고학적 범주가 일부 지역에 한정된 국지적, 분기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연맹 형성 요인으로 설정된 교역이나 군사적 공동 대응 등 연맹 형성의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연맹체론이 부정되기도 하였다.
최근 연맹체론의 대안으로 제기된 은하 정치체론은 변한왕이 있던 김해의 구야국을 중심으로 주요 거점의 제국이 분산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구조이지만, 변한왕과 주변국의 위계 관계가 불안정한 구조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회 발전 단계 문제는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되어야 하지만 자료의 한계로 인하여 그것을 구체적으로 살피지 못하였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서에 다수 언급된 정치체 간의 교역, 전쟁을 통하여 정치체 수장의 성격과 위상 변화를 추론함으로서 사회 발전 단계의 대강을 살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