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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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도(渡),진(津),포(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양훈 |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의 낙동강을 비롯한 주요 하천을 통해 선박이 주변 지역으로 넘나들 수 있도록 만든 교통 시설.
[개설]
나루는 일찍부터 하천을 활용한 교통이 활성화되면서 수심이 얕고 유속이 빠르지 않는 하천(河川) 또는 하구(河口) 연안의 곳곳에 형성되었다. 고문헌에서 나루는 도(渡), 진(津), 포(浦) 등이 설치된 곳을 지칭하며, 그 주변에는 물자 운송 등의 교통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다양한 숙식 시설이 마련되면서 취락이 형성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나루는 자동차, 기차 등의 새로운 교통 수단의 등장과 육로, 철로, 교량 등의 개설로 인해 점차 사라졌고, 지명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김해 지역은 일찍부터 낙동강을 비롯한 하천과 바다를 통한 교통이 발달하여 각지에 나루와 그것을 보조하는 취락이 형성되었다. 김해 지역의 나루는 낙동강에 주로 위치한 진과 과거 해안가였던 곳에 위치한 포로 구분되는데,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고, 지명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가야 시대의 나루]
김해 지역 나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허황옥이 수로왕과 결혼하기 위해 와서 배를 대었던 곳이 별포라고 전하며, 허황옥 사후에 주포촌(主浦村)이라고 고쳤다고 한다. 이곳의 위치에 대하여 가락국기에서는 대궐 아래로부터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곳의 산 밖에 위치하였다고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의 조선 시대 지리지에는 관아의 남쪽 40리에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서로 다른 나루가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발굴 조사를 통해서도 나루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봉황동에서 선착장과 선박 부재, 관동동에서 선착장과 도로 시설이 조사되어 나루를 통해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음이 증명되었다.
[조선 시대의 나루]
김해 지역 나루에 대한 기록은 고려 시대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김해읍지』 등의 여러 지리지에 등장한다. 나루의 분포는 낙동강과 그 외 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낙동강 유역은 진영읍·한림면, 생림면, 상동면, 대동면 등에 나루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진영읍·한림면에는 주진(注津)[본산리 주호마을], 명례진(明禮津)[가동리 가동마을], 가산진(佳山津)[가산리 신전마을], 상탄진(桑灘津)[안하리 장재마을] 등이 있었는데, 모두 사라지고 이름만 전해오고 있다. 그 중 주진은 『경상도속찬지리지』에 “김해부 북쪽에 해양진과 주진이 있다”고 기록된 점으로 보아 일찍부터 밀양과 양산 등지를 오가는 나루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명례진은 본래 이름이 ‘멱례진(覓禮津)’이며, 밀양시 명례마을에서 유래되었지만, 『김해읍지』에 “이북면 4리에 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한림면과 하남읍을 오가는 나루였던 것으로 보인다.
생림면에는 고성진(古城津)[마사리 마사마을], 뇌진(磊津)[마사리 독산마을], 창암진[안양리 창암마을], 도요진[도요리 도요마을] 등이 있었다. 이 중 뇌진은 앞서 언급한 주진과 함께 일찍부터 운영된 해양진(海陽津)이며, 김해부와 밀양 용진을 연결하는 나루터였다. 창암나루는 삼랑진이라고도 하였는데 낙동강 건너 삼랑진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불려진 것이었다. 도요나루는 김해와 밀양 삼랑진을 연결하는데, 김종직의 시 “도요저(都要渚)”와 『김해읍지』에서 알 수 있듯이 일찍이 낙동강 변의 풍요로운 곳으로서 유명하였다.
상동면에는 용당진(龍堂津)[상동면 여차리 용산마을], 감로진(甘露津)[상동면 감로리 감로마을], 포항진[상동면 매리] 등이 있었다. 용당진은 ‘용산나루’라고 불렸으며,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와 연결되었고, 1980년대 말까지 운영되었다고 한다. 감로진은 양산시 물금읍 황산진과 연결되었으며, 고려~조선시대의 유명 사찰인 감로사가 인접하였기 때문에 이곳을 방문한 승려나 관료들이 감로진을 거쳐갔을 것으로 보인다.
대동면은 황산진[월촌리 월당마을], 조눌진[조눌리 조눌마을], 아막진[초정리 안막마을], 명포진[주동리 신명마을], 선만진[주중리 주중마을], 산산진[예안리 마산마을] 등이 있다. 황산진은 양산 황산진과 연결되었으며, ‘동원진’, ‘월당진’이라고도 불렸는데, 주변에 덕산역원, 황산역원 등 주요 역원이 위치하였던 점을 보면, 이곳은 수로 교통의 거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산진은 산산창과 인접하여 조선 후기 명지도의 소금을 한양으로 운송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그 외 지역에는 불암진(佛巖津)[불암동], 방포(防浦), 강창포(江倉浦)[강동], 남포(南浦)[화목동], 곤지진(昆池津)[칠산 이동], 마찰진(麻札津)[칠산 이동], 범동포진(凡東浦津)[신문동 범동포마을], 조만포진(潮滿浦津)[부산광역시 가락동 조만포] 등의 나루가 있었다.
불암진은 조창인 불암창으로부터 서울 경창으로 세곡을 운송하기 위해 이용되었던 나루이다. 방포는 현재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각종 지리지에서 “부의 서쪽 5리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고, 19세기에 제작된 「동여도」에 유민산[현재 임호산] 오른쪽에 표기된 점을 보아 해반천 하류인 전하동에 위치하지 않았나 싶다. 남포는 고려 우왕 때 박위가 남포로 침입한 왜구를 전멸한 곳이었으며, 각종 지리지에 수록된 금릉팔경 중 한 곳으로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곤지진은 칠산 이동에 있었던 곤지도에서 유래되었고, 김해읍에서 장유면 응달리로 연결된 조만강의 나루로 1980년대까지 운영되었다고 알려졌다. 마찰진은 흥동에서 장유 신문진으로 연결되었던 나루이며, 역마가 나룻배를 건너기 위해 쉬어갔던 곳이라고 한다. 1981년 마찰교가 가설되면서 선박 운영이 중단되었다. 범동포진은 녹산수문이 생기기 전 장유면의 농산물 등 각종 물자를 부산까지 보내기 위해 이용되었던 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