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309
한자 面里制
영어공식명칭 Myeonrij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백지국

[정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선 시대 김해도호부의 하위 행정 체제.

[개설]

면리제(面里制)는 국가가 지방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군현의 하부 단위로, 면과 리로 세분하여 편제한 행정 제도이다. 면리라는 용어는 고려 시대부터 확인되나, 본격적으로 제도화한 것은 조선 시대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정부는 개국과 함께 행정 제도와 관료 제도를 개편하여 중앙집권적 양반 관료 국가를 형성하고자 하였다. 지방 통치 체제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 정비되었다. 특히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했던 고려와 달리 조선은 합리적이고 일원적인 지방 통치 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에 군현제를 정비하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등 일련의 개편 작업을 수행하였다. 나아가 효율적인 지방 통치를 위해 고을마다 개별적으로 존재하였던 하부 구조를 면리로 개편하고자 하였다.

지방 통치 체제는 15세기 초 일단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면리제의 경우 실제 정착된 것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였다. 면리제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향촌 개발이 어느 정도 진행이 되어야 했고, 향촌 내 양반 사회의 정착도 요구되었다. 또한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도 뒷받침되어야 했다.

면리제는 15세기 후반 편찬된 『경국대전』을 통해 법제화 되었지만, 구체적인 정책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피폐해진 국가를 재건하고 향촌 사회에 대한 통제를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반포된 「호패사목(號牌事目)」, 「오가통사목(五家統事目)」, 「양역변통절목(良役變通節目)」 등을 통해서 본격화 되었다. 17~18세기 정부의 정책 속에 향촌 지배와 관련된 면리 조직과 직임이 정비되었고, 향촌 사회 내 경제적·사회적 진전이 맞물리면서 전국적으로 면리제가 정착되어 갔다. 김해부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 17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면리제가 정착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김해도호부의 면리제]

김해도호부에 설정된 방명(坊名)은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와 비변사(備邊司印)의 『영남지도(嶺南地圖)』 등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여지도서』에는 대산면(大山面)·대야면(台也面)·상동면(上東面)·생림면(生林面)·우부면(右部面)·유등야면(柳等也面)·율역면(栗亦面)·잉질촌면(芿叱村面)·좌부면(左部面)·주촌면(酒村面)·중북면(中北面)·진례면(進禮面)·칠산면(七山面)·하계면(下界面)·하동면(下東面)·하북면(下北面)·활천면(活川面) 17개 면과 명지도(鳴㫖島) 1개 도가 확인된다. 『영남지도』에는 유등야면을 제외한 16개 면이 확인된다. 이어 18세기 후반의 상황을 보여주는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면리가 망라되어 있는데, 면의 경우 녹산면·대산면·대야면·상동면·생림면·우부면·유등면·율역면·잉질촌면·좌부상단면(左部上端面)·주촌면·중북면·진례면·칠산면·하계면·하단면(下端面)·하동면·하북면·활천면·명지도 20개면이 기재되어 있다.

1832년(순조 32)경 편찬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는 대산면·대야면·녹산면(菉山面)·명지도면(鳴㫖島面)·상동면·생림면·우부면·좌부면·율리면(栗里面)·유등야면·주촌면·중북면·진례면·칠산면·하계면·하동면·하북면·활천면까지 17개 면이 나타난다. 1860년대 김정호(金正浩)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대야면·부내면(府內面)·상동면·우부면·유등야면·율역면·잉촌면(芿村面)·좌부면·주림면(朱林面)·주촌면·중북면·진례면·칠산면·태산면(太山面)·하계면·하동면·하북면·활천면 18개 면과 수다부곡(水多部曲)[김해시 대동면 수안리]으로 편제되어 있으며, 1895년경 편찬된 『영남읍지(嶺南邑誌)』에는 가락면(駕洛面)·녹산면·대산면·대야면·덕도면(德島面)·명지도면·상동면·생림면·우부면·유하면(柳下面)·율리면·장유면(長有面)·좌부면·주촌면·중북면·진례면·칠산면·하계면·하동면·하북면·활천면 등 모두 21개 면으로 증가하였는데, 이 편제가 20세기 초반까지 유지되었다. 조선 후기 동안 김해도호부는 16~21개 면으로 구획되었고, 그 중간에 면명(面名) 변경과 일부 면의 통폐합 및 치폐가 거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부세 행정에서 해당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면민(面民)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면의 하부를 이루고 있는 동리 현황과 그것의 변동 사항은 자료의 한계로 일괄적으로 파악하긴 어렵고, 수치만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 현황을 보여주는 『호구총수』에는 관내 205개 리가 호구와 함께 나열되어 있다. 이후 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1895년경 편찬된 『영남읍지』에는 모두 228개의 리가 확인된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