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314
한자 朝鮮 時代
영어공식명칭 The Joseon Dynast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백지국

[정의]

1392년부터 1863년까지 경상남도 김해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조선 개국 초 김해 지역은 김해부(金海府)로서 지부사(知府事)가 파견되어 통치하고 있었다. 이후 정부의 지방통치체제 개편 과정에서 1413년(태종 13) 도호부(都護府)가 설치되었고, 도호부사(都護府使)가 파견되어 통치하였다. 1895년 23부제로 개편될 때까지 읍격의 변화 없이 도호부로 존속하였다.

[행정 구역의 변천]

조선왕조 개창 직후 김해 지역은 부(府)의 읍격(邑格)을 가지고, 지방관으로 지부사가 파견되었다. 이후 새 왕조의 통치 체제에 맞게 지방 행정 제도가 순차적으로 개편되어 갔다. 1413년 고을의 읍명(邑名) 및 읍격 개편 논의 결과, 각도에서 부(府)라고 부르던 곳이 도호부로 개편되었다. 이에 김해부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가 되었으며, 지방관으로는 종3품의 도호부사가 파견되었다. 이후 김해 지역은 1895년 전국적인 행정 구역 개편이 이루어질 때까지, 변경 없이 도호부로서의 읍격을 유지하였다.

부(府) 아래에 배속된 고을들의 경우 조선 전기에는 아직 중앙의 통제력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려 시대와 마찬가지로 읍치(邑治) 및 직촌(直村), 그리고 속현(屬縣)·향(鄕)·소(所)·부곡(部曲)과 같은 임내(任內)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에 따르면 김해도호부의 임내로 웅신현(熊神縣)·완포현(莞浦縣) 2개 속현과 대산부곡(大山部曲)·천읍부곡(川邑部曲) 등이 속해 있었다. 이중 웅신현·완포현·천읍부곡이 1451년(문종 1) 웅천현(熊川縣)으로 통합되어 독립하였다.

김해도호부면리제가 정착된 것은 조선 후기 이후의 일이었다. 조선 후기 동안 김해도호부는 16~21개 면으로 구획되었고, 그 중간 중간에 면명(面名) 변경과 일부 면의 통폐합 및 치폐가 거듭되었다. 면의 하부를 이루고 있는 동리의 경우 18세기 후반 편찬된 『호구총수』에는 205개의 리(里)가 확인된다.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1895년경 편찬된 『영남읍지』에는 모두 228개 리가 확인된다.

[인구와 경제적 기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조선 전기 김해도호부의 인구는 1,290호 13,872명[남 6,642명, 여 7,230명]이었고, 간전(墾田) 7,809결이 있었다. 토의(土宜)는 벼·조·콩·보리·메밀·뽕나무·삼[마(麻)], 토공(土貢)은 꿀·밀[황랍(黃蠟)]·녹포(鹿脯)·모래무지[사어(沙魚)]·건합(乾蛤)·우무[우모(牛毛)]·미역·어교(魚膠)·종이·가는 대[소(篠)]·왕대[탕(簜)]·사슴가죽·여우가죽·삵가죽·노루가죽·수달피(水獺皮)·오징어뼈·백복령, 토산(土産)은 사철(沙鐵)·은석(銀石) 등이 있었다.

조선 후기 김해도호부의 인구와 전결은 모두 증가하였다. 18세기 김해부의 인구는 9,107호 35,833명[남 15,750명, 여 20,083명]이었고, 전답은 한전(旱田) 4,360결 43부 3속, 수전(水田) 5,703결 64부 2속으로 나타났다.

인구의 증가와 농업 경제의 발달은 유통에도 영향을 주어 장시(場市)의 확대로 이어졌다. 19세기 김해도호부 지역의 대표적인 장시로는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서 확인되는 읍장(邑場)·설창장(雪倉場)·성법장(省法場)·신문장(新門場)·반송장(盤松場)이 있었다.

[재지사족의 동향]

『경상도지리지』를 보면 김해의 토성으로 김(金)·허(許)·배(裵)·송(宋)·손(孫)·유(庾) 6개 성씨, 내성(來姓)으로는 정(鄭)·맹(孟) 2개 성씨, 대산부곡의 전(田)씨, 천읍부곡의 공(公)씨가 확인된다. 속현인 웅신현의 토성으로 서(徐)·주(州)·유(劉) 3개의 성씨와 완포현의 토성으로 전(田) 1개의 성씨가 수록되어 있다. 조선 전기 읍지에서 확인되는 김해 토성 집단은 고려 시대 이래 지역의 향리직(鄕吏職)을 세습하며 실질적으로 고을의 행정을 주도한 집단으로 이해된다. 이들은 고려 후기~조선 전기를 거치면서 이족(吏族)과 사족(士族)으로 분화하였다.

김해의 대표적인 토성인 김씨의 경우 고려 후기~조선 전기 상경종사를 통해 성장한 가문으로 김보(金普)·김유(金庾)·김조(金銚)[?~1455]·김계희(金係熙)·김극검(金克儉)[1439~1499] 계열과 영남사림파 가문으로 성장한 김일손(金馹孫)[1464~1498] 가문이 있다.

여전히 김해에 거주한 김씨들은 사족과 이족으로 분화되었는데, 사족으로 성장한 집단은 유향소 등의 향촌 기구를 활용하여 향촌 사회를 주도하는 집단으로 발전해 갔고, 이족은 호장직을 세습하며 향리층으로 남았다. 김해 허씨와 김해 배씨의 경우 고려 후기~조선 전기 상경종사한 집단이 다른 고을의 사족 가문으로 성장하였지만, 김해 지역에서는 이족세가 강하였다. 고려 후기~조선 전기 토성의 성장은 다른 지역 사족을 김해로 견인하는 역할을 하였고, 그 결과 이른 시기 김해 지역에 다양한 사족 가문이 정착할 수 있었다.

재지 사족 층의 성장은 성리학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 전기 김해도호부 지역에서 학풍을 주도했던 것은 관학(官學)인 향교(鄕校)였다. 김해향교(金海鄕校)는 고려 후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운영된 것은 조선 시대였다. 교육과 교화의 중심지로 활용되던 향교는 점차 피역(避役)의 소굴로 전락하여, 교육적 기능은 약화되고 제향의 기능만 유지되었다. 이에 재지사족들은 향교를 대신할 기구로 서원(書院)을 건립하여 운영하였다. 조선 시대 건립된 김해도호부의 서원은 신산서원(新山書院)·예암서원(禮巖書院)·송담서원(松潭書院)·물봉서원(勿峰書院)·구천서원(龜川書院)·미양서원(薇陽書院) 등이 있었고, 사우로는 현충사(顯忠祠)가 있었다. 이중 신산서원이 1609년(광해군 1) 사액(賜額)을 받아 김해의 유일한 사액서원으로 존속하였다. 이 외에도 연자루(燕子樓)·함허정(涵虛亭)·산해정(山海亭) 등의 누정(樓亭)이 세워져 사림들의 교유처로 활용되었다.

한편, 김해도호부 지역은 일찍이 김일손과의 인연 속에서 학문적 영향을 받았었고, 이에 경상우도(慶尙右道)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초기 영남사림파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16세기 김해도호부의 학문에 영향을 크게 끼친 인물은 영남학파(嶺南學派)의 한 축을 형성했던 조식[1501~1572]이었다. 조식의 처가인 남평 조씨(南平 曺氏) 가문은 김해에 세거하고 있었다. 혼인으로 김해와 인연을 맺은 조식은 이곳으로 이주하여 산해정을 짓고, 학문 연마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조식 사후인 1576년(선조 9) 조식과 신계성을 제향한 신산서원이 건립되면서 16세기 남명학파(南冥學派)가 김해도호부 지역의 주류 학풍으로 자리를 잡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대북(大北) 정권이 몰락하고, 남명학파가 침체되었다. 김해도호부 출신 중에는 대북 정권에 깊숙이 가담한 인사가 없었으므로, 정치적 풍파는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김해도호부의 학풍은 조식→곽재우(郭再祐)[1552~1617]→정구(鄭逑)[1543~1620], 조식→정온(鄭蘊)[1569~1641]으로 이어지는 학문적 계보를 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퇴계학파와 인연을 맺으며 18~19세기에 이르러 퇴계학파에 속하는 인사들이 등장하였다.

[일본과의 관계]

김해는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탓에 조선 시대 대일 관계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조선 시대 김해와 일본의 관계에서 중요한 사건은 삼포 개항과 삼포왜란, 임진왜란 등을 꼽을 수 있다.

삼포 개항은 일본의 지속적인 통교 요구에 김해의 속현인 웅신현의 내이포(乃而浦), 부산포(釜山浦), 염포(鹽浦) 등을 개항한 일이었다. 이후 개항장을 중심으로 조일 무역 문제가 처리되었는데, 점차 늘어나는 항거왜인(恒居倭人)으로 인해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에 항거왜인을 적절히 통제하고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 1451년(문종 1) 김해의 임내인 웅신현·완포현·천읍부곡을 통합하여 웅천현으로 독립하면서 대처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일본과의 통교 문제를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하였고, 1510년(중종 10) 삼포왜란이 발발하였다. 김해는 삼포왜란의 핵심 공간으로 많은 피해를 보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조선은 큰 피해를 보았는데,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운 김해의 피해는 극심하였다. 김해는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가 이끈 제 3군의 침입을 받았다. 일본군은 죽도(竹島)에 상륙하였고, 곧 김해성(金海城)을 함락시켰다. 송빈(宋賓)·이대형(李大亨)·김득기(金得器)·유식(柳湜) 등이 관민(官民)을 이끌고 적군과 맞서 싸우다 순국하였다. 전쟁 초 일본군의 영향력 아래 놓인 김해는 임진왜란이 종결될 때까지 일본군의 최후방 거점 기지로 활용되었다. 그럼에도 김해의 백성들은 김해도호부사의 지휘 아래 인근 고을 전투에 참여하여 싸웠다. 이처럼 전쟁 초 김해성이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며 김해 지역은 전쟁 기간 내내 일본군으로부터 큰 피해를 보았다. 인명 피해는 물론 물리적 수탈 등이 이루어졌으며, 많은 김해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포로 가운데는 도공(陶工)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일본에 조선의 도예 기술을 전수해 준 집단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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