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3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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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倭城 |
영어공식명칭 | Japanese Castles in Korea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안성현 |
[정의]
임진왜란 시기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왜군이 쌓은 성.
[개설]
왜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공한 후, 남해안을 중심으로 왜군의 근거지를 확보하거나 서로 간의 연락 및 조선군의 공격에 대비하고자 축성한 일본식 성곽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전선의 확장과 함께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축성한 성[계성(繫城), 전성(傳城)]이 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올 때를 위하여 평양, 한성부, 부산에 쌓았던 것으로 알려진 고죠쇼[御座所], 그리고 일부 읍성 가운데 확인되는 일본식 성벽 등이 광의의 왜성에 포함된다. 왜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축성된 것으로 나누어진다.
임진왜란[1592~1596] 때에 축조된 성은 서생포 왜성, 서생포 왜성의 지성, 임랑포 왜성, 기장 죽성리 왜성, 동래 왜성, 부산 왜성, 부산 왜성의 지성[자성대 왜성], 동삼동 왜성, 구포 왜성[감동포 왜성], 죽도 왜성[김해 왜성], 죽도 왜성의 지성[신답·마사 왜성], 가덕도 왜성, 가덕도 왜성의 지성, 안골포 왜성, 웅천 왜성, 웅천 왜성의 지성[자마·명동 왜성], 영등포 왜성[거제 장목], 장문포 왜성[거제 장목] 등 20여 개다.
정유재란[1597~1598] 때 왜성은 임진왜란 당시의 경험을 토대로 본토와의 연락을 도모함과 동시에 조선군과의 전선이 동쪽으로는 울산과 서쪽으로 순천까지 확대되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쌓았던 서생포 왜성과 그 지성, 구포 왜성, 죽도 왜성과 지성[신답 왜성·마사 왜성], 가덕도 왜성, 웅천 왜성과 그 지성, 거제도 내의 왜성 등을 1597년 가을에 증축하였다. 그리고 울산 왜성을 비록한 양산 왜성[증산 왜성], 창원 왜성[마산 왜성], 고성 왜성, 사천 왜성, 남해 왜성, 순천 왜성 등 7개소를 새롭게 쌓았다.
[왜성]
한반도에 축성된 왜성의 입지를 보면, 남해안의 요소(要所)를 선정하고 반드시 강이나 바다에서 200~500m 거리의 독립된 구릉을 택하였다. 구릉의 높이는 해발 10m에서 높게는 해발 200m에 위치하였다. 왜성의 구조는 방어를 중심으로 건축하였으므로 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이루고 있다. 특히 서생포 왜성과 웅천 왜성은 ‘본환(本丸)’·‘이지환(二之丸)’·‘삼지환(三之丸)’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방어하기에 유리한 구조이다. 규모는 대형급[800~1,100m×400~1,100m], 중형급[350~500m×200~800m], 소형급[100~200m×100~250m]으로 나뉘어진다.
성벽은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화강암, 현무암, 청석 등을 사용한 잡석공적(雜石空積)이 대부분이고 밤돌(栗石)을 잘 충전하여 견고히 하였고, 적심[裏面]에는 유밤돌 외에 흙을 충분히 다졌다. 성벽은 토축(土築)보다 석축(石築)이 많았다. 외벽은 자연석 쌓기[野面積], 할석 잔돌 끼워 난적 쌓기, 가공석 쌓기 등의 방법으로 축조하였으며, 모서리[隅角部] 부분은 엇갈려 쌓기[算木積]와 세워 쌓기[縱石積] 방법으로 축조하였다. 석축의 높이는 대개 3~10m 정도였으며, 표면의 기울기[表面句配]는 70° 또는 80°로 경사지게 쌓았다.
왜성은 전통적인 우리나라 성곽과는 입지와 형태, 축조 수법이 전혀 다른 구조였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 이루어진 많은 전투에서 왜성이 방어에 유리한 구조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왜란 이후 왜성의 축성법을 도입하려는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김해의 왜성]
김해 지역에는 임진왜란 당시 죽도 왜성의 지성인 신답왜성과 마사왜성이 축조되었다. 두 왜성은 잔존 상태가 불량한 편인데, 신답 왜성은 본환을 제외하고는 석축 성벽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마사 왜성(馬沙 倭城)은 경상남도 김해시 생림면 마사리 1구에 있는데, 서쪽의 밀양강과 남서쪽의 낙동강 상류가 만나는 전략상 중요한 요충지이다. 북쪽으로는 삼랑진과 양산으로 연결되며, 남동쪽으로 약 20㎞ 지점에 죽도 왜성이 위치한다. 죽도 왜성과 지성인 신답 왜성은 1593년(선조 26)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부자가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성은 해발 50m 정도의 산 정상에 본환(本丸)을 두고 북쪽 능선을 따라 단차를 이루는 지형에 이지환(二之丸)과 삼지환(三之丸)을 둔 제곽식이며, 평면형태는 ‘L’자 상에 가깝다.
본환과 이지환 사이에는 노대상(櫓臺狀)의 엇갈림식 호구(虎口)가 확인된다. 북쪽으로 내려오는 경사면의 동·서 양단에 너비 1m, 높이 1m 정도의 토성벽이 확인된다. 남쪽에서도 호구로 추정되는 세 개의 개구부가 남아 있다. 그리고 항공 사진에서는 계단식 밭처럼 보이는 곳이 있는데, 곡륜(曲輪)으로 추정된다.
문헌 기록은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大東地志)』와 『여도비지(輿圖備志)』에서만 확인된다. “마사 왜성은 북쪽 40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는 700척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고전 철(高田 澈)은 마사 왜성이 신답 왜성과 달리 죽도 왜성을 조망할 수 없어 지성으로 기능을 하였는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마사 왜성이 한반도의 전통적인 성곽과 차이가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성격에 대해서는 시·발굴조사 결과를 근거로 논의하는 것이 타당하다.
신답 왜성은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농소리 산1-1번지 일원에 있다. 이곳은 고 김해만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북동쪽의 조만강에는 덕진교포라는 작은 소(沼)가 있는데, 왜성이 위치하였던 것으로 보아 조선 시대에는 선박이 자유롭게 운항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답 왜성에서 남동쪽으로 약 6.5㎞ 지점에 죽도 왜성이 위치한다. 신답 왜성은 1593년(선조 26) 죽도 왜성의 지성으로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부자가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성은 지표상으로 정확한 형태를 알기는 어렵다. 이지환과 주변 곡부는 현재 국도 14호선 개설로 인해 멸실되었으며, 삼지환은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낮은 고지 중앙에 남북으로 갈라지게 큰 굴절(堀切)과 동쪽 산정에 높은 토루를 이용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해발 110m의 정상부에 본환의 석축성벽이 확인되며, 그 아래쪽에는 밭이 여러 단을 이루고 있다. 본환의 성벽은 평면 방형의 자연석 쌓기[야면적(野面積)]를 하였다. 곡륜은 동서 약 30m, 남북 약 15m에 이른다. 나머지 곡륜은 전형적인 삭토법으로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지환은 침식성 저구릉의 정상부를 성토하여 대지를 조성한 다음 서쪽과 남쪽에 곡륜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그 위에 아무런 석축이나 목책 등 인공적인 구조물이 설치되지 않았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신답 왜성은 축조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사정으로 축성을 포기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의의]
한반도에 축조된 왜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항구적인 지배를 위해 왜군이 쌓았던 성으로 현재 30여 개가 남아 있다. 김해 지역에는 임진왜란 당시 죽도 왜성의 지성인 마사 왜성과 신답 왜성이 축조되었으나 잔존 상태는 불량한 편이다. 하지만, 왜성은 당시 조선 백성들의 노력으로 축조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에서는 왜성을 일본 성곽 연구의 표준 화석이라고 할 만큼 일본 내에서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이에 따라 당시의 왜성 발달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일본 뿐만 아니라 당시 동양 삼국의 축성 교류사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김해 지역 왜성은 개발 행위로 인해 훼손이 심하게 이루어졌으므로 발굴 조사를 진행하여 정확한 구조와 성격을 밝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