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원연합군의 일본 정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321
한자 麗元聯合軍- 日本 征伐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신은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274년 10월 3일연표보기 - 1차 여원연합군 일본 정벌 개시
종결 시기/일시 1281년 7월연표보기 - 2차 여원연합군 일본 하카다만에서 철수

[정의]

고려와 원의 연합군이 현재의 경상남도 김해시를 근거지로 하여 1274년과 1281년 2차례에 걸쳐 일본을 정벌하려 한 사건.

[개설]

고려를 귀부시킨 원의 쿠빌라이는 일본을 복속시키려 하였다. 1266년부터 사신을 파견해 일본의 귀부를 강요하였으나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끝내 거부하였다. 한편 고려 내에서 반원 저항을 펼치던 삼별초가 진압된 이후 쿠빌라이는 여원연합군을 결성해 1274년과 1281년 2차례에 걸쳐 일본 원정을 단행하였다. 1차 원정에서 쓰시마와 이키섬을 장악한 뒤 하카다에서 일본군을 밀어붙이던 여원연합군은 태풍으로 인해 철수하였다. 2차 원정은 남송을 정벌한 쿠빌라이가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1281년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때 가마쿠라 막부는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또다시 태풍이 불어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현재 경상남도 김해 지역인 금주는 당시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웠고 교류가 빈번하였기 때문에 일본 원정의 전진 기지가 되었고, 일본 원정에 사용되는 물자의 공급과 각종 지원으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여원연합군은 고려의 합포에서 출발하였는데 합포는 금주의 속현으로서 현재의 김해시에 거주했던 금주도호부사가 합포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역사적 배경]

고려를 복속시킨 원나라의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단행하였다. 원이 세력을 확장해 갔던 목적에 대해서 현재까지 정설화된 것은 없으나 약탈을 주로 하였던 유목 민족의 특성이 반영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원 쿠빌라이의 일본 원정은 1차, 2차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1차 원정은 남송 정벌의 일환으로 진행되었고, 2차 원정은 남송 정벌 후 동아시아 전체 제패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원은 고려의 삼별초를 진압한 뒤, 적극적으로 일본 원정을 기획하였다. 처음 원은 사신을 통해 평화적 복속을 강요하였으나 가마쿠라 막부가 이를 거부해 2차례에 걸친 대규모 원정을 단행하였다. 원이 일본 원정을 단행하면서 금주와 그 예하 속현인 합포를 근거지로 삼은 것은 이곳이 일찍부터 일본과 교류하던 곳이자 천혜의 항구가 발달한 지형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 원은 금주 등지에 둔전경략사를 설치해 일본 원정의 군량을 원활하게 수급하려 하였다.

[경과]

삼별초가 완전히 진압되자 원 세조 쿠빌라이는 본격적인 일본 원정을 준비하였다. 이에 고려의 합포 인근으로 원정군이 집결하였다. 1274년 10월 3일 몽한군(蒙漢軍) 25,000명, 고려군 8,000명, 초공(梢工)·인해(引海)·수수(水手) 6,700명이 탑승한 전함(戰艦) 900여 척이 합포를 떠나 일본으로 향하였다. 10월 4일에서 5일에 걸쳐 쓰시마를 점령한 여원연합군은 10월 14일 이키섬을 공략하였고 10월 15일 함락하였다. 이키섬을 장악한 여원연합군은 10월 19일 하카다만에 모습을 나타냈고, 이튿날인 10월 20일 여원연합군과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교전하였다. 교전에서 여원연합군은 일본군을 압도하였다. 일본의 긴 활인 장궁에 비해 여원연합군의 활은 짧지만 사거리는 서너 배에 달하였고, 화약 무기 또한 일본군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다만 일본군도 상당히 선전하였는데 여진족 출신의 좌부원수(左副元帥) 유복형(劉復亨)이 부상을 당할 정도였다. 다자이후까지 진격한 여원연합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배로 회군하였으나 갑작스런 풍랑으로 배가 침몰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고 철수하였다.

1차 원정이 실패하였지만 쿠빌라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남송을 정벌한 이후 약 10만의 강남군을 동원하여 일본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이와 동시에 고려에서도 여원연합군을 출진시켰다. 1281년(충렬왕 7) 5월 3일 합포를 출발한 여원연합군 4만명은 5월 21일 쓰시마를 공략한 뒤 곧이어 이키섬으로 향하였다. 풍랑으로 부분적 피해는 있었으나 이키섬을 정벌한 여원연합군은 6월 6일 하카다 인근까지 진출하였다. 여원연합군은 6월 7일부터 일본군과의 전투에 돌입하였다. 비교적 작은 배를 타고 여원연합군을 공격한 일본군은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고 이후 여러 곳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강력한 군세로 대결하던 여원연합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한 것은 2차 원정에서도 태풍이었다. 태풍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여원연합군은 결국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8월 16일 충렬왕에게 원정이 실패해 원수(元帥)들이 돌아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결과]

여원연합군의 2차례에 걸친 일본 원정은 결국 실패로 종결되었다. 일본 원정에서 고려는 막대한 물적 인적 피해를 입었다. 원정에서 돌아오지 못한 고려 군사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일본 원정에 소요되는 각종 물자와 역의 징발로 인해 고려의 백성들이 큰 고초를 겪었다. 원감국사 충지가 남긴 시에는 당시 일본 원정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를 묘사하였는데, “백성들이 전역에 가니 고을은 비었고”와 같은 표현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일본 원정이 실패한 후 원과 고려 정부는 일본의 역공을 대비해야만 하였다. 이에 금주 등지에 진변만호부를 설치하여 혹시 모를 일본의 공격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 원정의 실패는 일본에게도 타격을 주었는데 막대한 군비를 지출한 가마쿠라 막부는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무너졌으며, 일본도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일본 원정의 실패는 거시적으로 보아 동아시아 역사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한반도는 중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인 반면 일본은 중국과 비록 교류는 하였지만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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