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9년 이도장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327
한자 李道章事件
영어공식명칭 The Lee-Dojang incident
이칭/별칭 이도장의 변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백지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729년연표보기 - 1729년 이도장 사건 발생
종결 시기/일시 1729년 - 1729년 이도장 사건 종결
성격 무고 사건
관련 인물/단체 이도장|박문수

[정의]

조선 후기 김해부 출신 이도장이 일으킨 사건.

[개설]

이도장(李道章)은 조선 후기 김해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영조실록(英祖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보면 이도장은 1725년(영조 1)과 1726년(영조 2)에 노론의 입장을 대변하는 소청 활동을 하였다. 1725년 상소에 ‘소두(疏頭)’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경상도에서 활동하고 있던 노론계 인사들에게 명망이 있었던 인물로 이해된다.

[역사적 배경]

1729년 이도장 사건이도장과 박문수(朴文秀) 간에 있었던 일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발생하였다. 『승정원일기』에 수록된 박문수의 상소를 통해 사건의 배경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상소문은 박문수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어 이도장의 입장은 알 수 없지만, 1729년 이도장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상소에 따르면 이도장은 김해에 살면서 금법(禁法)을 범해 나라에서 쌓은 제언(堤堰)을 차지하고 이를 통해 상당수의 전지를 마련하였다. 제언이 넓지 않아 물을 가두지 못하였던 데다 물을 가두더라도 모두 이도장의 전지였으므로, 백성들이 매우 힘들어 하였다. 이에 박문수가 부사로 하여금 살펴보게 하였고, 사실 확인 후 제언을 허물고 물을 백성들의 전지에 대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도장을 유배 보내려고 하였으나, 신분이 양반이었으므로 태(笞)를 조금 치고 풀어 주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도장은 박문수에게 원망의 마음을 품고 그를 무고하게 되었다.

[경과]

이도장은 박문수가 암행어사로 활동할 때 “해인사에 가서 12명의 수령 모임에 참석하였다”는 말과 “거창(居昌) 소사(素沙)의 적진에 가서 머물렀습니다.”라는 소문을 내어 박문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중 “거창 소사의 적진에 머물렀다.”는 내용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였다. 소사는 안음(安陰)과 무주(茂朱)의 경계로, 거창은 이인좌의 난 당시 주동자였던 정희량(鄭希亮)이 군사를 일으킨 곳이다. 이도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박문수는 무신란(戊申亂)[이인좌의 난] 전에 적의 정세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고발하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이 중앙에 알려지게 되면서, 조정에서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되었다. 박문수는 문제의 당사자였으므로, 오광운(吳光運)에게 조사를 명하였다.

[결과]

조사 결과 이도장이 박문수를 무고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도장은 붙잡혀 국문을 받고 처형되었다.

[의의와 평가]

1729년 이도장 사건은 자료가 풍부하지 않아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다. 전라도관찰사 이광덕(李匡德)이 올린 상소를 보면 “토호(土豪)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너무 심하게 제거하는 것을 미워하여 거짓으로 근거없이 만들어 낸 말이 경외에 전파된 것으로 노론 집안인 이도장의 변란이라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라고 사건의 전말을 밝히고 있다. 즉, 지역의 유력한 인사와 관권의 대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도장은 김해 지역 노론 가문 출신이고, 박문수는 소론계 인사였으므로 둘의 대립은 더욱 첨예하였을 것으로 이해되나, 이와 관련하여 김해 지역 노론계 인사들의 집단적인 활동을 보여주는 자료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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