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371
한자 金海邑城
영어공식명칭 Gimhae Eupseong Fortres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분성로335번길 44[동상동 873]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안성현

[정의]

조선 시대 경상남도 김해시 대성동, 동상동, 서상동, 봉황동 일원의 평지에 축조되었던 읍성.

[개설]

김해읍성분산성의 남서쪽에 형성된 김해 시가지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대 사회부터 이용되었던 낙동강 수로의 출발점이며, 왜구 방어의 요해처였다. 1451년(문종 1)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 정분(鄭苯)의 서계(書啓)에 의하면 ‘읍성은 세종 16년(1434) 동[해동문(海東門)]·서[해남문(海南門)]·남[진남문(鎭南門)]·북[공진문(拱辰門)]의 4대문이 있었으며, 옹성이 4개소, 여장이 931개였고, 성내에는 개천 1곳, 우물 28곳, 둘레는 4,418척, 해자 둘레 4,683척’이라고 하였다. 1895년(고종 32) 이후 대부분 철거되었다.

지적원도가 측량된 1913년까지 성벽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으나 현재는 도시화로 인해 대부분 훼손되었고, 동상동 일대에 북벽 일부가 남아있다. 옹성과 치성을 제외한 성벽의 둘레는 1,950m이다. 성 내부에는 객사[분성관(盆城館)]을 비롯한 아사[어목당(禦牧堂)], 향청, 내장대, 군관청, 토포청, 인리청, 의군, 서역소, 노방, 상하방, 교방, 호적고, 대동고, 관청고, 경창, 읍창, 군기고, 진휼고 등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별중영(別中營)도 운영되었다. 하지만, 공해(公廨) 시설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위치와 구조는 알 수 없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김해읍성은 영남대로(嶺南大路)의 우로(右路)와 중로(中路), 좌로(左路)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고대로부터 이용된 낙동강에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수로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왜구 방어의 요해처에 해당한다. 조선 전기 연해 방어 전략에 충실하게 왜구의 방어와 지역 치소의 역할을 위해 축조되었다.

[관련 기록]

김해읍성과 관련된 기록은 조선 시대 다양한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이 중 『문종실록』 문종 1년 9월 5일의 기록은 “충청·전라·경상도 도체찰사 정분이 아뢰기를, 경상도·충청도 각 고을의 성자(城子)는 당초에 법식에 의하여 쌓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규칙에 맞지 않았습니다. …… 김해부 읍성은 주위가 4,418척, 높이 13척이고, 여장의 높이는 2척이며, 적대가 20개소, 문이 4개소인데 옹성이 있고, 여장이 931개이며, 성 안에 냇물이 1개소, 우물이 28개소이고, 해자의 주위는 4,683척입니다”라고 기술하고 있어 대략적인 구조를 알 수 있다.

김해읍성의 초축 시기는 『세종실록』과 『여도비지』, 『대동지지』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 16년인 1434년에 초축되었고, 문종 원년에 옹성과 적대 및 해자 등의 부속 시설이 축조되면서 기본적인 읍성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사료들에서는 폐우(廢禑), 즉 고려 우왕 때 박위가 석성으로 수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기록된 정몽주(鄭夢周)의 기문(記文)에서는 “박위가 고산성을 수축하였다”라 적고 있어서, 고려 말 박위가 수축한 성곽은 분산성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읍성의 둘레는 4,000척, 4,480척, 4,683척으로 나누어진다. 이 중 4,480척은 『문종실록』이 유일하다. 그 이외 1530~1903년까지 편찬된 문헌은 시기별로 일관성 없이 규모를 반복하고 있다. 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앞선 자료에 대한 재인용의 결과이거나 부속 시설인 치나 옹성 같은 구조물의 폐기 및 개축이 이루어지면서 규모가 변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김해읍성의 구조는 19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김해부내지도(金海府內地圖)」에 잘 나타나 있다. 지도에서는 북동쪽과 남동쪽 성벽 중앙을 호계천이 북에서 남쪽으로 흐르며, 성벽에는 수문이 표현되어 있다. 성문은 네 방향에 모두 설치되어 있는데, 성 내부의 동-서 도로와 남-북 도로가 연결되는 곳에 설치되었다. 동-서 도로의 북동쪽에 객사와 함허정, 연자루, 분성대, 청뢰각, 부사, 집사정 등의 공해 시설이 위치하였다.

[내용]

김해읍성 발굴 조사에서 성벽과 부속 시설의 구조가 어느 정도 밝혀졌다. 성벽의 둘레는 1,950m로 지적원도와는 차이가 있다. 성벽은 지형에 따라 축조 이전 생활면을 굴착한 후 지형과 지질적인 요인에 따라 잡석 다짐, 나무 지정(地釘)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여 지반을 강화하였다.

기저부 위로 장방형 형태의 큰 돌로 지대석(地臺石) 1단을 성벽 진행 방향으로 놓았다. 기단석(基壇石)은 지대석에서 10~25㎝ 정도 들여서 1단을 쌓았다. 외벽은 기단석에서 10~20㎝ 정도 들여 대형의 석재를 사용하여 허튼층쌓기를 하였다. 면석은 자연석을 일부 가공하였으며, 면석 사이의 빈틈은 30㎝ 내외의 할석을 쐐기돌을 끼워 견고성을 높였다. 적심(積心)은 면석과 동시에 쌓았다. 성벽 외부는 지대석과 연접하는 부분에 소형의 판석과 잔돌로 부석하였다.

치성은 부분적으로 조사가 이루어져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으나 확인된 최대 규모는 길이 880㎝, 너비 750㎝이다. 치성은 성벽의 외벽에 덧대어 축조하였다. 평면 형태는 말각장방형에 가까운데 치성의 모서리 부분은 직각과 말각 형태가 모두 확인된다. 발굴 조사 결과 서벽 치성의 남쪽 모서리는 수축된 것임이 밝혀졌다.

해자는 북문지 조사에서 처음으로 조사되었다. 해자의 진행 방향은 성벽과 일정 거리를 이격하여 진행하다 옹성 부분에서는 옹성과 같은 방향이다. 그리고 축조 수법 역시 지대석과 기단석을 둔 성벽과 달리 지대석만을 둔 옹성과 같다. 따라서 옹성과 동시기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문은 북문지가 조사된 이후 복원이 이루어졌다. 문지는 2차례 고쳐 쌓았다. 초축 문지의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으나 성문에서 초석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홍예식으로 설치된 후 개거식으로 개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변천]

김해읍성의 변천 과정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세종 16년에 석축성으로 축조되었으며, 문종 원년 옹성과 해자, 치 등이 가축되면서 기본적인 읍성의 형태를 갖추었다는 것 이외의 정보는 알 수 없다. 성벽과 북문지, 옹성, 해자의 조사 결과 최소 2차례 이상의 수·개축이 확인됨으로써 폐성되었던 시기의 모습은 초축 시기와 달랐음이 분명하다.

「김해부내지도」『김해읍지(金海邑誌)』에서 확인되는 공해 시설을 보면, 읍성의 중앙부에서 동-서, 남-북 도로의 북쪽에 집중되어 있다. 이 중 청해당은 1609년(광해군 1)의 기록에 홍수로 인해 김해의 객사인 청해당이 무너졌다는 언급이 있다. 외삼문(外三門)인 청뢰각(晴䨓閣)은 1649년(효종 즉위년)에 부사 이상경이 창건한 것으로 1712년(숙종 38)에 부사 이판옥이 돌기둥을 세워 중수하였다고 하였으며, 이후 멸실 기록은 없다. 연자루는 1677년(숙종 3) 부사 변국한(邊國翰)이 중건하였고, 1687년(숙종 13) 부사 이행익(李行益)이 중수하였는데, 이후 약 250년 만에 완전히 철거되었다. 함허정연자루와 마찬가지로 주정에 해당하는 건물로 1497년(연산군 3)에 부사 최윤신(崔潤身)이 신축하고 당대의 좌의정 어세겸(魚世謙)에게 청하여 ‘함허’라고 칭하였다. 이와 더불어 『김해부읍지』와 『김해부지리지』에서는 북문의 이름이 ‘공진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666년(현종 7) 이화악(李華岳)이 문루를 중건하였으므로 2차례의 수축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김해읍성은 초축과 폐성 당시의 모습은 달랐음을 쉽게 추정할 수 있으며, 향후 조사, 특히 공해 시설의 조사에서 시기별 경관을 밝혀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의의와 평가]

김해읍성은 조선 전기 지방 지배와 관방 체계에 따라 김해 지역에 축조된 평지 읍성으로,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의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김해읍성의 외부에는 김해고읍성이 위치하였다. 김해읍성은 성벽이 축조된 이후 옹성·해자·치가 후대에 축조되었으며, 문헌에서도 수축과 개축의 기록이 남아 있다. 성 내부에는 호계천이 흐르고 있었으며, 공간 구조는 조선 시대의 이념적 배치를 따르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 축성법과 변천, 고읍성과 읍성의 관계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다만, 성벽과 부속 시설-옹성, 치, 해자-의 구조와 변천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확보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내부 공해 시설의 변화는 알려지지 않으므로 학술 발굴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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