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3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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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屯田經略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관부(전통 시대)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신은제 |
[정의]
1271년부터 1278년까지 일본 원정과 몽골군 주둔 비용 마련을 위해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설치했던 둔전 관리 기구.
[개설]
고려와 강화가 성립되자 원 세조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계획하였는데 이때 소요되는 막대한 군수를 충당하기 위해 봉주(鳳州)와 금주(金州) 등지에 둔전을 두고 둔전경략사를 설치해 둔전을 관리하였다. 금주, 즉 김해에 둔전경략사가 설치된 것은 합포에 몽골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군량을 충당하려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1274년(원종 15) 1차 일본 원정이 끝난 후 둔전경략사의 폐해가 대두되었고, 1278년 충렬왕의 외교적 노력으로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를 복속한 원 세조 쿠빌라이는 일본을 복속시키려 하였다. 쿠빌라이는 1266년(원종 7)부터 일본에 사신을 보내 일본의 귀순을 종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편 1270년(원종 11) 출륙 환도가 이루어지자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켜 진도에 웅거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몽골군이 고려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몽골의 중서성은 1270년 11월 쿠빌라이에게 고려 주둔 몽골군의 군수를 위해 둔전을 설치하고 둔전경략사의 설치를 건의하였다. 1271년 1월 고려 원종은 강력하게 둔전의 설치를 반대하였으나 3월 둔전경략사가 설치되었다. 금주에는 5,000명의 둔전군이 주둔하였는데 당시 금주에 둔전군을 주둔시킨 것은 금주가 일본 정벌의 전초기지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경략사였던 흔도와 홍다구는 진도에 웅거한 삼별초의 토벌을 담당하였고 제주의 삼별초도 직접 정벌하였다. 따라서 둔전경략사는 고려에 주둔하면서 한편으로는 일본 정벌을 준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삼별초 정벌의 임무도 맡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조직 및 담당 직무]
몽골은 흔도(忻都)·사추(史樞)·홍다구(洪茶丘)를 둔전경략사의 사(使)로 삼아 둔전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아랄첩목아(阿剌帖木兒)[아라트테무르]가 부경략사(副經略司)로 임명된 것으로 보아 경략사에는 사와 부사의 직임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둔전경략사는 일본 원정의 준비 뿐 아니라 삼별초 정벌이라는 직무도 담당하였다.
[관련 기록]
[지원(至元) 7년, 1270년] 11월 25일, 중서성(中書省)에서 아뢰기를, “고려에 둔전경략사(屯田經略司)를 설치하여 흔도(忻都)[힌두]와 사추(史樞)를 봉주(鳳州) 등지의 경략사(經略使)로 삼고 군 5,000명을 통솔하여 금주(金州)에 둔전을 경영하도록 하였습니다.[『원고려기사(元高麗紀事)』]
[변천]
고려에 주둔하고 있던 몽골군은 1278년(충렬왕 4) 고려에서 철수하였고 이 때 둔전경략사도 폐지되었다. 김방경 무고 사건을 계기로 몽골에 입조한 충렬왕이 둔전군의 철수를 요구하였고 이를 쿠빌라이가 수용하여 흔도와 홍다구가 지휘하던 몽골군도 고려에서 철수하였다.
[의의와 평가]
둔전경략사는 고려가 몽골에 투항한 이후 삼별초의 진압과 일본 정벌을 위해 주둔한 몽골군의 군수를 지탱하기 위해 설치된 기구였다. 이는 고려 건국 이래 처음으로 외국 군대가 고려에 주둔한 사례였다. 따라서 고려 국왕들은 몽골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몽골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