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3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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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別中營 |
영어공식명칭 | Byeoljung-y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백지국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설치한 지방 군영.
[개설]
별중영(別中營)은 김해진영(金海鎭營)에 소속된 속오군(束伍軍)을 지휘·훈련하기 위해 인조[1623~1649] 연간에 설치되었다. 김해도호부사가 별중영장을 겸직하였으며, 1728년의 무신란 때에는 경상우도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하였다. 1895년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627년(인조 5) 조선 정부는 지방군 강화를 위해 영장제(營將制)를 실시하였다. 영장제는 각도에 5영을 두고, 영마다 당상(堂上) 이상의 영장(營將)을 파견하여 속오군을 지휘하고 훈련시켰다. 도(道)의 규모와 군사적 중요성에 따라 3~4영이 설치되기도 하였지만, 추가로 별영(別營)을 설치하고 별영장(別營將)을 파견하기도 했다. 초창기에는 무관을 전담 영장으로 임명하였으나, 병자호란과 영장 공궤(供饋)로 인한 재정 악화, 문신 수령과의 갈등 등으로 논란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1637년 전담 영장제가 폐지되고, 수령이 영장을 겸관(兼官)하였다. 1654년(효종 5) 북벌(北伐)이 추진되는 가운데 삼남(三南) 위주로 전담 영장이 파견되었고, 지역에 따라 전담 영장과 겸관 영장이 혼재하였다.
경상도에는 전영·좌영·중영·별중영·우영·후영 6영을 설치하였다. 별중영은 인조 연간 김해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별중영장은 김해도호부사(金海都護府使)가 겸직하였다.
[관련 기록]
『속대전(續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등 조선 후기 법전(法典)의 ‘병전(兵典) 외관직(外官職)’ 편에 별중영의 직제가 규정되어 있다. 또한 『여지도서(輿地圖書)』 하(下), 경상도, 우도병마절도영(右道兵馬節度營) 군병(軍兵) 편을 비롯해 김해도호부를 소개한 각종 읍지(邑誌) 자료에는 별중영의 편제를 수록해 놓았다.
[내용]
『속대전』 등에 따르면 경상도에는 6원의 영장을 둔다고 하였다. 이때 전영장(前營將)은 안동, 좌영장(左領將)은 상주, 중영장(中營將)은 대구, 별중영장(別中營將)은 김해, 우영장(右營將)은 진주, 후영장은 경주에 두었는데, 별중영장은 김해도호부사가 겸직하였다. 『여지도서』 하, 경상도, 우도병마절영, 군병 편에는 별중영장 아래에 천총(千摠) 2인, 파총(把摠) 4인, 마별장(馬別將) 2인, 초관(哨官) 30인, 기패관(旗牌官) 53인, 영장표하군(營將標下軍) 55명, 장관표하군(將官標下軍) 385명, 기수군(旗手軍) 92명, 취고수(吹皷手) 63명, 당보군(塘報軍) 97명, 속오군 마군(馬軍) 579명, 보군(步軍) 2,141명, 복마군(卜馬軍) 230명, 화병(火兵) 297명이 편제된 것으로 나타난다.
[변천]
별중영은 1728년(영조 4) 경상우도 지역에서 무신난(戊申亂)이 일어났을 때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1895년(고종 32) 단행된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별중영의 존재는 김해 지역이 조선 시대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