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359
한자 水站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양훈

[정의]

조선 시대 경상남도 김해 지역 낙동강 하류 포구에 있었던 해상 교통 시설.

[개설]

수참은 조창, 화물 운송 뿐만 아니라, 사객 이동을 보조하는 해상 교통 시설이었다. 김해 지역은 낙동강과 남해를 연결하는 낙동강 하구 유역에 위치하였고, 일찍부터 각종 물자의 운송과 함께 왜인들이 자주 오가는 곳이어서 이러한 시설을 설치하는데 최적의 입지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개국 후 낙동강을 비롯한 경상도 일대는 일본인과의 교류가 빈번하였고, 15세기 무렵 낙동강을 비롯한 여러 교통 요충지에 역원과 수참을 신설, 증설, 보강하는 등의 대책을 마련하였다. 1432년(세종 14) 일본 사신이 상경하는 경로를 분산하는 것으로 정해지면서, 제포에서 오는 자는 창원·성주·옥천·청주·진천·죽산·용인·한강을 경유하여 입경(入京)하게 하니, 김해 낙동강 하류부터 수로를 이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인들과 접대 물품, 무역 물품 등의 수송량이 급증하면서 제포왜관이 감당하기에 한계에 이르자 1457년(세조 3)에는 하삼도를 순찰한 도순찰사 박강(朴薑) 등이 낙동강수참 설치를 건의하였다. 이때 김해부 생림면[현 김해시 생림면] 도요저가 언급되었지만, 군사적 감찰, 통제 뿐만 아니라 물품 수송과 교류 측면에서 양산 동원진보다 부적합하여 제외되었다. 그러나 낙동강 하류의 김해 지역에 수참이 있었는데, 명월산 아래 구량촌[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구량동]에 견조암수참으로 알려졌으며, 왜인 선박 왕래 및 정박지로서 일본인의 숙박과 접대를 제공한 곳이었다.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해도호부, 산천, 명월산조에 “명월산은 부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산 아래 구량촌(仇良村)에 견조암수참(見助巖水站)이 있는데 왜사를 접대한다.”라고 기록에 되어 있다. 견조암수참에 대하여 고려 시대 일본과의 대외 교섭을 담당한 금주 객관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서로 연결되는 명칭이나 기록 등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이 추정은 무리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 한편 『여지도서』[1757~1765년], 산천, 명월산에 “산 아래 구량촌에 견조암수참이 있어서 왜국 사신을 접대한다”고 되어 있고, 1895년 간행된 『김해읍지』 명월산에는 “산 아래 구량촌에는 견조암수참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왜국의 사신을 영접하였으나 지금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김해 지역 수참의 설립과 폐지 시기가 기록된 자료는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김해부 관할이었던 견조암수참은 1544년 사량진왜변 이후 다른 포소왜관(浦所倭館)이 모두 폐쇄되고 부산포왜관으로 단일화될 때 함께 폐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사촬요(攷事撮要)』「왜인조경도로(倭人朝京道路)」에서 견조암수참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측되는 김해 부근의 낙동강 수로가 더 이상 상경로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의와 평가]

수참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김해를 비롯한 낙동강 유역의 교통로를 복원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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