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349
한자 鎭管制
영어공식명칭 System of Jingwan(鎭管)
이칭/별칭 진관체제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강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1457년연표보기 - 진관제 시행
폐지 시기/일시 1555년연표보기 - 진관제 폐지

[정의]

조선 전기 경상남도 김해 지역을 포함하여 전국에 설치하였던 지방 군사 조직을 일원적으로 구축한 방어 체제.

[개설]

진관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명문화된 조선 전기의 지방 군사 조직인데, 주진(主鎭)-거진(巨鎭)-제진(諸鎭)의 체계로 이루어졌다. 1457년 중앙[수도] 방어를 위해 오위(五衛) 체제를 정비하면서 지방의 군사 방어 체제로서 진관제(鎭管制)를 함께 시행하였다. 진관제는 세조 이전에 있었던 군익도(軍翼道) 체제를 보완·발전시킨 것이었다. 진관제는 지휘관이 지휘하는 곳에는 주진(主鎭)을, 내륙의 군사적 요충지에는 거진(巨鎭)을 각각 설치하고, 주변 여러 고을[諸鎭]을 소속 시켜 전국의 국방력을 일원적으로 체계화한 지역 중심 방어 체제였다. 경상도의 김해 진관에는 창원도호부, 함안군, 거제, 칠원, 진해, 고성, 웅천현이 속하여 김해도호부사(金海都護府使)의 군사적 지휘를 받았다. 진관제는 을묘왜변(乙卯倭變) 이후 제승방략(制勝方略) 분군법으로 바뀌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전기 방어 체계는 국경의 연해(沿海) 지역에 진(鎭)을 설치하여 북쪽의 여진, 남쪽의 왜구에 대한 방어 태세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해 지역의 진이 적에게 돌파당하면 내륙 지역에는 방어 병력이 없어서 제대로 대응할 수 없는 모순을 안고 있었다. 이러한 약점은 세종 말부터 문제로 인식되면서 지방군 체제 개편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진관제는 1457년 8도에 주진, 거진, 제진을 두어 내륙 지방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전국적으로 군사적 통일성을 도모하기 위한 제도로 시행되었다. 경상도의 경우 1466년(세조 12) 낙동강을 기준으로 경상 좌도와 우도에 병마절도사의 주진으로 병영(兵營)이 울산과 창원에 자리했는데, 경상 우도에는 상주, 진주, 김해 진관이 속하여 운영되었다. 이런 모습은 『경국대전』 4권, 병전(兵典), 외관직(外官職) 조에 나타난다.

[관련 기록]

『경국대전』 4권, 병전(兵典), 외관직(外官職) 조에 도별로 진관과 그에 속한 고을이름이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내용]

조선의 지방 군사 체제는 1392년 건국 이후 변화를 거치면서 진관제로 정비되었다. 1397년(태조 6) 주요 거점별로 첨절제사(僉節制使)가 상주하는 군진(軍鎭)을 설치하여 지역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1436년(세종 18)에 경상도의 좌도와 우도의 울산과 창원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시행되면서 병영을 설치하였다. 1447년(세종 29)에 국방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전국의 군현을 상·중·하로 분류하였는데, 김해는 중긴(中緊)으로 분류되었다. 1455년(세조 원년) 양계의 군익도(軍翼道) 체제를 전국으로 확대하였는데, 김해는 좌익에 속하였다. 1457년(세조 3) 군익도 체제를 진관체제로 바꾸었다. 이때 그동안 지방군의 파악 단위였던 도(道)가 행정 구역의 도와 혼동되는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진(鎭)으로 바꾸면서 군사적 성격을 분명하게 하였다. 진관제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주진 아래에 몇 개의 거진을 두고, 거진의 첨절제사(僉節制使)가 여러 진(諸鎭)을 통할하게 하며, 제진의 절제도위(節制都尉)나 만호(萬戶)는 그 진을 중심으로 외적 방어를 책임지는 체제였다. 조선 전기 경상도에는 우도에 상주 진관, 진주 진관, 김해 진관이 있었으며, 좌도에 안동 진관, 대구 진관, 경주 진관이 있었다. 김해 진관에 속한 거진에는 창원부와 함안군, 제진에 속한 거제현, 칠원현, 진해현, 고성현, 웅천현이 김해 진관의 지휘를 받았다. 이때 군수와 현감은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자격으로 해당 군사를 지휘하였다. 1458년(세조 4) 중익의 기능이 주진으로 옮겨가고, 우익과 좌익의 구분이 없이 거진으로 통합되면서 진관제는 완성되었다.

진관제는 각 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주진에서 지휘하고, 주진 아래 거진에는 지방 수령들인 부윤(府尹)·목사(牧使)·부사(府使) 등이 절제사(節制使)와 첨절제사(僉節制使) 등의 군사적 업무를 겸임하였다. 또 말단의 진에서는 군수(郡守)·수령(守令)·현감(縣監) 등이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절제도위(節制都尉) 등을 겸하였다. 경상도의 경우 창원과 울산에 주진이 설치되어 있었고, 상주·진주·김해·안동·대구·경주에 거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경상남도 김해시에는 김해 진관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창원, 함안, 거제, 칠원, 진해, 고성, 웅천이 소속되어 김해도호부사의 지휘를 받았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김해부 소속 군정(軍丁)은 시위군 47명, 영진군 120명, 선군(船軍) 882명이었으며, 경상도 유방군(留防軍) 2려(旅) 250명이 주둔하였다. 이때 김해부에 속한 웅신현에는 영진군 120명, 선군 84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변천]

대규모 외적 방어에 적합했던 진관제는 16세기에 여진족과 왜구의 대규모 침입이 계속되자 문제점이 드러났다. 조선 건국 이후 사회의 안정 속에 피역(避役)의 증가 등으로 조선 전기의 군역(軍役) 제도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이때 가장 큰 문제는 군역제의 변동으로 병력수의 감소가 나타난 점이었다. 이에 도 전체의 거점을 방어하는 진관제를 유지할 수 없어서 징발 가능한 모든 병력을 약속된 특정 지역에 집중시켜 방어하는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를 시행하였고,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이후 지방군이 붕괴되어 나갔다.

[의의와 평가]

진관제는 각 행정 구역이 자치적으로 군사적 기능을 담당하였고 수령의 지휘 아래 지리적 특성에 맞는 작전을 구사할 수 있었다. 또한 하나의 진관이 패배하면 다른 진관이 공백을 메워서 싸우기 때문에 지역 거점 방어에 유리하였다. 그러나 진관제는 병농일치(兵農一致)를 기반으로 하는 군역제 아래에서 운영되었지만, 지주제의 발달과 군역제의 변화로 자영농이 몰락하면서 군사의 군역 부담을 지원해 주던 보인(保人)의 수도 자연히 감소하였다. 이것은 자연 촌(村)을 기초 단위로 성립한 행정 체제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면서 결국 진관제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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