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진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369
한자 蒜山津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양훈

[정의]

조선 후기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 마산마을에 있었던 나루.

[개설]

조선 후기 낙동강 하구에 위치하였던 산산창(蒜山倉)을 운영하는데 사용되었는데, 정부의 재원을 확보하고 진휼을 위해 주로 명지도에서 생산된 소금을 이송하는데 이용되었다. ‘산산(蒜山)’이란 지명은 현재 지명인 ‘마산(馬山)’과 같은 뜻을 가진 것으로서 중심에 있는 산, 들, 마을 등을 이르는 우리말 ‘말뫼’와 관련이 있다. 한자로 적으면서 “마산”은 말 마(馬) 자를 음차하여 마산이라 하였고, “산산”은  또는 가 변이된 마늘 산(蒜) 자를 훈차하여 산산이라고 하였다고 전해진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산산진의 설치 시기와 목적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강선생봉산욕행록(寒岡先生蓬山浴行錄)』에서 1617년 7월 25일, 한강 정구 일행이 산산진에서 삼차강을 거쳐 스승 남명 조식을 모신 신산서원에 참배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산산창이 설치되기 이전부터 산산진은 운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관련 기록]

산산진은 1895년 간행된 『영남읍지 김해부사례(嶺南邑誌 金海附事例)』에 “산산진(蒜山津) 김해부 동쪽 30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1929년 간행된 『김해읍지』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

산산진은 1744년(영조 20)에 산산창을 설치한 사실과 『영남지도』「김해」[일명 「비변사인방안지도」]에 산산창과 산산진이 한 건물 위에 표시된 점을 보면, 주로 명지도 소금을 보관하면서 쌀과 교환하는데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대동면 예안리 마산마을에 나루가 설치되었던 것은 육지의 곡식과 명지도의 소금을 교환하는 중계 역할을 하기 위해서 혹은 낙동강 하구의 삼각주가 발달하면서 교통상의 변화가 생겼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낙동강 하구의 소금 유통과 수상교통로를 복원하는데 중요한 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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