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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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海 地域 四月革命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창섭 |
[정의]
1960년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선거에 저항하여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일어난 민주 항쟁.
[개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은 부통령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실로 유례를 찾기 힘든 부정 선거를 저질렀는데, 공무원 불법 선거 운동, 4할 사전 투표, 3인조 5인조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이었다. 3월 15일 곧바로 마산에서 부정 선거 규탄 시위가 벌어졌고, 이후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전 민중의 반정부 투쟁으로 고양되었다. 4월 19일 피의화요일사건을 지나 4월 26일 이승만 하야로 막을 내린 4월혁명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일어난 최초의 민주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 배경]
4월혁명의 배경은 첫째, 이승만 정권에 의한 부산정치파동, 사사오입개헌 등의 민주주의 파행 때문이다. 어느 것 할 것 없이 폭력을 통해 의회 민주주의를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권력 기반을 확충하려는 시도였다. 이승만 정권은 더 나아가 진보당사건과 조봉암에 대한 사법 살인으로 대표되는 정적 제거에도 부심하였다. 둘째, 원조 경제 체제 아래 형성된 삼백산업으로 말미암아 집권 관료층과 대기업의 결탁이 심대하여지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저곡가 정책 등으로 인하여 기층 민중의 생활이 나날이 곤궁해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정치 경제적 모순이 누적되어 민중의 분노가 임계점에 다다른 상황에서 이승만 정권은 아랑곳없이 유례를 찾기 힘든 3·15부정선거를 저질렀고, 이에 분노한 학생, 시민 그리고 기층 민중이 부정 선거 규탄을 넘어 반독재 투쟁으로 나아갔다.
[경과]
초기 4월혁명을 이끈 주도층은 중고등학생이었는데, 김해 또한 당시 김해농업고등학교[현 김해생명과학고등학교] 학생들이 교내에서 스크럼을 짜고 시위를 하다가 김해 시가지로 진출하여 3·15부정선거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였다. 제2차 마산항쟁이 발발하면서 4월 20일에는 김해농업고등학교, 김해중학교, 김해여자중학교 학생 200명이 시위를 전개하다가 경찰과 충돌하여 좌절되었다. 4월 24일에도 김해농업고등학교와 김해여자중학교 학생이 중심이 되어 부정 선거를 규탄하고 학원 자유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4월 22일에는 김해 지역 민주당 소속 정치인들의 시위도 있었다. 4월 19일 약 130명이 사망한 이른바 피의화요일사건에도 불구하고 반독재 시위가 누그러지지 않고 대학 교수단 데모까지 벌어지자, 4월 26일 이승만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하야하였다. 이로써 제1공화국은 무너지고, 외무부장관이었던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다.
[결과]
3월 15일 선거 부정 규탄으로 촉발된 반정부 투쟁은 김해 지역은 물론 전국으로 확산하여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켰다. 이후 혁명이 가져다 온 새로운 사회 분위기에 조응하여 구체제를 청산하기 위한 다양한 변혁 운동이 제기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