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390 |
---|---|
한자 | 現代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창섭 |
[정의]
1945년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경상남도 김해 지역의 역사.
[개설]
약 4만 5천 년 전 현생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이래 장구한 발전을 거듭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생 인류의 유구한 발전 과정을 하나의 단위로 뭉뚱그려 파악하면 우리 인류의 변화 양상과 특징을 쉬이 규명해 낼 수 없기에 역사가들은 그 시기를 몇 단계로 나누어 파악하고자 한다. 이른바 원시, 고대, 중세, 근대로 구획 짓는 시대 구분론이다. 본디 시대 구분론은 4시기 구분론이 원칙이었으나, 근대 사회의 심연한 발전 양상에 따라 근대라는 개념에서 현대를 분리시켜 지금은 주로 5시기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기할 점은 시대 구분 용어에는 인류사가 끊임없이 발전하여 왔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는 것으로서, 시대 구분론을 언급할 때 이 전제를 염두에 두고 사용하여야만 한다.
세계사적 측면에서 현대의 시점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이며, 한국은 1945년 해방을 현대사의 시점으로 역사가들이 ‘잠정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잠정적이라 함은 남북이 분단된 민족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2개의 현대사가 병립하는 현실에 따른 것으로, 남북통일에 의한 완전한 민족 국가, 국민 국가 성립의 역사적 과제가 실천된 이후에야 진정한 현대의 출발을 규정할 수 있다는 믿음과 합의가 기초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945년 이후 한국은 분단과 전쟁의 상흔에도 불구하고 근대 사회의 근본 원리라 할 수 있는 민주화와 산업화를 일거에 이룩하며 세계사적 모범 국가로 우뚝 섰다. 한국을 구성하는 김해 또한 현대 한국 사회의 격동에 조응하여 현대의 다양한 특질을 체화해 내면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정치]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조선인들은 신국가 건설을 위한 기반 조성에 돌입하였다. 여운형과 안재홍을 중심으로 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곧이어 전국 각지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지부가 결성되었다. 김해에서는 8월 17일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지부 발기인 모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지부가 결성되었다. 군을 중심으로 하여 면과 그 아래 단위인 마을에 이르기까지 계통적으로 조직화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미군의 진주와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이라는 정치적 변화에 조응하면서 김해건국준비위원회 지부가 해소되고 김해인민위원회로 전환되었다. 김해인민위원회는 친일파 청산과 토지 개혁을 내걸고 신국가 수립 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하지만 38도선 이남에 자본주의 국가 수립을 당면 과제로 삼고 있던 미군정이 친일파와 우익 세력을 지원하게 되면서 정치적 헤게모니를 점차 상실하게 되었다. 인민위원회의 쇠퇴는 단독 정부 수립을 현실화한 것일 뿐만 아니라 김해 지역 좌익 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국민보도연맹이 조직되고 6·25전쟁 시기에 집단적 학살까지 이루어진 것은 이러한 흐름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정치적 발전을 대망하는 김해의 주체 세력이 다시 등장한 때는 4월혁명 시기였다. 혁명을 이끈 주도층은 김해농업고등학교[현 김해생명과학고등학교], 김해여자중학교, 김해중학교 등 당시 중고등학생들이었다. 3·15부정선거가 발생하자 마산에서 첫 시위가 발생하였는데, 마산 시위의 영향으로 인접한 김해에서도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일어났다. 4월 11일 제2차 마산시위가 벌어지자, 김해에서는 김해농업고등학교와 김해여자중학교 학생이 중심이 되어 부정 선거를 규탄하고 학원 자유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반정부 시위는 4월 26일 이승만의 하야 선언을 이끌어 내고 정치적 민주화의 단초를 열었다.
[사회]
현대 김해 지역 사회사를 대표하는 것은 새마을 운동이다. 새마을 운동은 1970년 새마을가꾸기운동으로 출발하였다. 새마을 가꾸기사업은 전국 33,000여 마을마다 시멘트 335포대를 지급하는 것을 골자로 한 것이었다. 소비는 개별 가호가 아닌 반드시 마을 단위로 이루어져야 하였기 때문에, 환경 개선을 축으로 하는 마을 공동 사업이 새마을 가꾸기사업의 핵심이 되었다. 전국 농촌 마을 가운데 약 50%에 이르는 마을에서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났다.
김해 지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미 김해 지역은 새마을 운동 이전부터 농민 사회의 주체적 농촌 운동이 존재하였고, 이러한 흐름이 1970년대 초 제3공화국의 관료제 확립 및 동원력 증진과 결부하면서 새마을 운동으로 승화된 것으로 보인다. 진영읍 의전리 등리마을, 대동면 수안마을 등에서 이러한 양상을 간취할 수 있다. 이들 마을은 이미 1960년대부터 마을 조직이 결성되고, 환경 개선, 소득 증대 등과 같은 사업이 추진되고 있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국가 주도의 농촌 운동, 즉 새마을 운동이 전국화하면서 김해 지역 새마을 운동의 양상도 국가사업으로 포섭되고 범주화, 체계화되었는데, 곧 환경 개선 사업과 소득 증대 사업이었다. 특히 소득 증대 사업은 새마을 운동의 지속화를 통한 농민 세계의 안정화를 도모하는 첩경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김해에서는 우수 마을을 중심으로 육성우사업, 양돈사업 등이 추진되었다. 진영읍 의전마을과 여래마을, 응달동 태정마을, 대동면 수안마을 등에서 소득 증대 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된 것으로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