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면 김지수 고문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474
한자 大東面 金- 古文書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문헌/문서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주중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구진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급 시기/일시 1844년 4월 15일연표보기 - 「대동면 김지수 고문서」 중 「완문」 발급
발급 시기/일시 1844년 4월 15일연표보기 - 「대동면 김지수 고문서」 중 「신산서원 동재 중수도감」 발급
소장처 김지수 가 -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주중리 지도보기
발견|발굴처 김지수 가 -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주중리
성격 고문서
관련 인물 김성윤|박진수|김한규
발급자 신산서원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주중리 김지수가 소장한 조선 후기 신산서원 관련 고문서.

[개설]

김해시사편찬위원회 편찬연구팀은 2017년 11월 2일, 김해시 대동면 주중리 마을 기초 자료 조사 중에 ‘신산서원 동재(東齋) 중수(重修)’ 관련 고문서 3점과 수로왕릉 안내도 등 근대 자료 10여 점 등 총 13건을 발굴하였다.

[제작 발급 경위]

「완문(完文)」과 「신산서원 동재 중수도감(新山書院 東齋 重修都監)」은 1844년[갑진년] 4월 15일 신산서원에서 발급하였고, 「신산서원 장의(掌儀)」는 신유년 2월 19일에 신산서원에서 발급한 것이다.

[형태]

「완문」은 1장으로 되어 있으며, 크기는 90.2×77.5㎝이다. 「신산서원 동재 중수도감」도 1장으로 되어 있는데, 크기는 116×65㎝이다.

[구성/내용]

「대동면 김지수 고문서」 중에 특히 주목되는 것은 신산서원 중수에 관한 3점의 문서이다. 먼저 「완문」은 신산서원 동재의 중수에 많은 재물을 출연한 김해 김씨 김성윤(金聖潤)과 밀성 박씨 박진수(朴震秀)의 공로를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취지의 문서이다. 「완문」 끝에는 50명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어, 당시 신산서원에서 「완문」의 내용을 결의한 인물들을 살펴볼 수 있다. 「신산서원 동재 중수도감」에는 중수 총책임자로 김성윤을 천거한다는 내용이 있으며, 말미에 회원 11명의 성씨와 서명이 나열되어 있다. 「신산서원 장의」와 관련한 문건은 김한규를 신산서원 장의에 천거한다는 내용으로 15명의 회원 이름과 서명이 나열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대동면 김지수 고문서」신산서원의 운영 양상을 생생히 파악할 수 있는 1차 자료이다. 신산서원남명 조식과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을 나란히 제향하는 서원으로 김해를 대표하는 서원이자 덕천서원[경상남도 산청군], 용암서원[합천군]과 함께 남명학파의 한 축을 담당하는 곳이다. 조식은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1532년 무렵 김해 처가로 이주하여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모친상을 당하는 1546년 무렵까지 그곳을 거점으로 강학하였고, 이후 합천 뇌룡정과 산청 산천재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수시로 산해정을 왕래하였다.

조식이 사망한 이후 1588년 산해정 동쪽 산기슭에 신산서원이 건립되었고, 조식의 학문적 인맥이 정리된 최초의 문건이 『산해사우연원록(山海師友淵源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을 보더라도, 김해는 당시에 조식의 학문이 절정을 이루었던 지역이자 핵심적인 제자들을 기른 장소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신산서원은 남명학파의 거점이 되는 곳이니, 그곳의 운영과 강학 활동은 조선 유학사에서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진다. 기존에 전해지는 신산서원 관련 자료 중에서 당대에 생성된 원본은 극히 드문데, 「대동면 김지수 고문서」는 이러한 자료상의 공백을 메워 신산서원의 역사를 세밀히 파악할 수 있도록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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