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송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598
한자 金海 宋氏
영어공식명칭 Gimhae Songssi|Gimhae Song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김해 송씨 본관 - 경상남도 김해시
성씨 시조 송천봉

[정의]

송천봉을 시조로 하는 경상남도 김해시의 세거 성씨.

[개설]

김해 송씨(金海 宋氏)는 김해 지역의 토성으로 시조는 송천봉(宋天逢)이다.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1425]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성씨조에서 지역의 토성으로 김(金)·허(許)·배(裵)·손(孫)·송(宋)·유(庾) 등 6개의 성씨를 소개한 이래, 이들 성씨는 조선 후기까지 김해 지역의 대표적인 성씨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송씨와 손씨, 유씨의 경우 1895년(고종 32) 간행된 『영남읍지(嶺南邑誌)』와 1899년 간행된 『김해군읍지(金海郡邑誌)』 단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송씨는 기록하고 있지만 각각 청주 송씨(淸州 宋氏)·은진 송씨(恩津 宋氏)·수원 송씨(水原 宋氏)였다.

토성층은 형성 시기부터 지속적으로 분화하였는데, 이는 토성 내에서 사족(士族)과 이족(吏族)으로 나누어지거나 자연재해, 전쟁, 혼인 등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해의 토성이었던 김해 송씨도 고려 후기 이래 끊임없이 분화하여 관료를 배출한 사족의 가계가 등장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가계도 많았을 것이다. 예컨대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는 송길정(宋吉貞)이 이주하여 송중문(宋仲文)-송희명(宋熙明)으로 이어지는 가계를 형성하였다.

[연원]

송천봉은 『고려사(高麗史)』「열전」에 실려 있는 인물이다. 1330년(충혜왕 즉위년) 10월 과거 시험에서 장원 급제한 후 정언(正言)·헌납(獻納)·기거랑(起居郞)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주로 언직(言職)에 있으면서 정치 기강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였다. 우왕(禑王) 대에 대사헌(大司憲),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를 역임하고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다가 81세 때 사망하였다. 아들은 송호(宋浩)인데 『씨족원류(氏族源流)』에는 군사(郡事)를 역임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고려사(高麗史)』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딸은 능성 구씨(綾城 具氏) 구성노(具成老)와 혼인하였다.

송천봉 외에 김해 송씨 인물로는 송기(宋耆)가 확인된다. 충렬왕(忠烈王) 대에 정승을 역임한 바 있는 안동 김씨(安東 金氏) 김방경(金方慶)의 묘지명에 “김방경의 어머니는 원흥진부사(元興鎭副使)인 낭장 송기(宋耆)의 딸로, 본관은 김해부(金海府)이다.”라고 하여 송기가 김해 송씨 인물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씨족원류』에서도 김해 송씨 인물로 송기가 신호위 정용낭장을 역임하였고, 딸이 김효인(金孝印)과 혼인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씨족원류』 김해 송씨 세계도에서는 하동 훈도(河東 訓導) 송충원(宋忠元)과 그 아들 송업(宋嶪)을 소개하고, 송득사(宋得師), 송포(宋褒)를 각각 기록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송득사와 송포의 활동은 확인할 수 있다. 송득사는 조선 태조(太祖) 때에 사재소감, 예빈경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414년(태종 14) 8월 경기우도수군첨절제사(京畿右道水軍僉節制使)로 재직할 때 풍랑으로 병선이 침몰하고 수군 10명이 익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처벌을 받아 직첩을 회수당했다가 다음 해 1월 직첩을 돌려받아 복권되었다. 송포는 1402년(태종 2) 문과 식년시(式年試)에서 11위로 합격하였다.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서 부, 조, 증조, 외조 등 4조를 밝히지 않았지만, ‘김해인(金海人)’이라 명기하고 있어 송포가 김해 송씨임을 확인할 수 있다. 1409년(태종 9) 9월 춘추관기사관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태조실록(太祖實錄)』을 편찬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논쟁을 벌였다. 이후 포천현감, 청주판관 등 지방관을 역임하고, 1428년(세종 10) 6월 사헌부장령으로 임명된 뒤 집의를 거쳐 전농시윤(典農寺尹), 예문관직제학,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판종부시사 겸 지형조사(判宗簿寺事 兼 知刑曹事) 등의 관직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입향 경위]

김해 송씨는 시조인 송천봉이 고려 후기 김해 지역에 정착하여 재지 이족으로서 기반을 갖추었다.

[현황]

1929년에 간행된 『김해읍지(金海邑誌)』 성씨조에서는 당시 김해 지역 13개 면(面)의 131개 리(里)에 거주하는 성씨를 동리별로 열거하였는데, 전체 성씨 수는 89개였다. 그런데 여기에 청주 송씨은진 송씨는 포함되어 있지만 김해 송씨는 찾을 수 없다. 김해 송씨 거주자가 없었거나 소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4년에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의 성[朝鮮の姓]』에는 전국의 지역별 성씨의 종류와 가구 수, 집성촌의 분포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서 당시 김해군에는 2만 2983가구, 108개의 성씨가 분포한 것으로 집계되어 있다. 김해 지역 108개 성씨 가운데 김씨가 5,921가구로 가장 많고, 송씨는 여덟 번째인 609가구로, 여기에서도 김해 송씨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이 통계에서는 집성촌을 형성한 성씨 30개도 함께 소개하였는데, 청주 송씨은진 송씨 집성촌은 있지만 김해 송씨 집성촌은 보이지 않는다.

2000년 통계청의 성씨 본관별 가구 및 인구 통계에 따르면, 당시 김해시 인구는 9만 8985가구에 33만 829명이었고, 여기에 225개의 성과 2,724개의 본관 성씨가 있었다. 이 가운데 100가구 이상 거주하는 성씨는 김해 김씨(金海 金氏) 등 128개 성씨가 있었다. 이 통계에서 김해 송씨는 전국적으로는 1,204가구에 3,813명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김해 지역에는 35가구에 89명이 거주하여 지역의 유력 성씨 대열에는 들지 못하였다.

2015년 통계청의 ‘인구 주택 총조사’에서는 가구 수는 없고 본관 성씨별 인구수만 조사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김해시 인구는 51만 2517명, 성씨는 143개, 본관은 820여 개로 집계되었다. 이 중 100가구로 추산되는 340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성씨는 김해 김씨를 비롯하여 169개 성씨 정도가 확인되었다. 이 통계에서 김해 송씨는 전국적으로는 1,149명, 김해 지역에는 22명 정도 거주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2000년도 조사에 비해 김해 송씨 인구는 전국적으로나 김해 지역 모두에서 감소한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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