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639
한자 金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조원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779년 - 김암 일본 사행
부임|활동지 양주 - 경상남도 양산시
부임|활동지 강주 - 경상남도 진주시
부임|활동지 한주 - 경기도 광주시
부임|활동지 패강진 - 황해도 평산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김해
대표 관직 집사시랑

[정의]

남북국 시대 경상남도 김해를 본관으로 하는 문신.

[가계]

김암(金巖)김유신의 손자인 김윤중(金允中)의 서손(庶孫)이다.

[활동 사항]

김암은 총명하고 민첩하며, 술법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숙위하면서 틈틈이 음양가의 술법을 배워 스스로 『둔갑입성지법(遁甲立成之法)』을 저술하였다. 당나라 대력(大曆) 연간(766~779)에 신라로 돌아와 사천대박사(司天大博士)가 되었고, 이후 양주(良州)[현 경상남도 양산시], 강주(康州)[현 경상남도 진주시], 한주(漢州)[현 경기도 광주시] 등지의 태수를 역임하였다. 그 후 집사시랑을 거쳐 패강진[현 황해도 평산군]의 두상(頭上)이 되었다.

김암은 태수로 재임할 때 가는 곳마다 진심으로 백성을 보살피고, 농한기 때 사람들에게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가르치니, 모두 유용하게 여겼다. 패강진두상으로 재임할 때 황충(蝗蟲)[누리]이 서쪽에서 날아와 패강진 일대를 덮쳐 백성들이 근심하였는데, 김암이 산마루에 올라 향을 피우고 주문을 외며 하늘에 기원하니 갑자기 비바람이 일어나 황충이 모두 죽었다고 한다.

779년(혜공왕 15)에 급찬으로 혜공왕의 명을 받아 살찬(薩湌)[사찬] 김난손(金蘭孫), 대판관(大判官) 한나마(韓奈麻)[대나마] 살중업(薩仲業)[설중업], 소판관(少判官) 나마(奈麻) 김정락(金貞樂) 등과 함께 일본 사신단의 부사(副使)로 파견되었다. 일본 왕이 김암의 현명함을 알고 억지로 붙들어두고자 하였는데, 마침 김암이 당나라 사신 고학림(高鶴林)과 만나 서로 매우 즐거워하였다. 김암이 당나라에도 알려진 것을 알고는 감히 억류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김암은 780년 2월 일본에서 출발하여 신라로 돌아왔다.

[학문과 저술]

김암은 음양가의 술법·천문학·병법에 능통하였으며, 『둔갑입성지법』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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