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 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301
한자 南北國 時代
영어공식명칭 Period of Southern and Northern Kingdom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
집필자 김광철

[정의]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병존한 시기 경상남도 김해 지역의 역사.

[개설]

남북국 시대는 신라와 발해가 한반도의 남과 북에 함께 존속하였던 시기를 말한다.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676년 삼국을 통합한 신라는 이후 멸망하는 935년까지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의 영토를 다스렸다. 698년 고구려 출신 대조영(大祚榮)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이끌고 발해를 세워, 926년 거란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한반도 북쪽 지역과 만주 일대를 다스렸다. 이 시기 김해 지역에는 금관소경이 설치되어 지역을 통제하였고, 김해소경으로 개칭되었다가 신라 후기 호족의 등장과 함께 김해부가 되었다.

[금관경의 성립]

신라와 국경을 접하며 긴장관계를 유지해 왔던 금관가야는 532년(법흥왕 19) 마침내 신라에 투항하고 말았다. 『삼국사기』에서는 그 투항 장면을 “금관국(金官國)의 왕인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큰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 아들 무력(武力) 등 세 명의 아들을 데리고 나라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금관가야의 투항을 맞아 신라 법흥왕은 예(禮)로써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었으며, 금관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신라에 투항한 후 금관국 왕족은 김무력(金武力)-김서현(金舒玄)-김유신(金庾信)으로 이어지면서 진골 신분의 대우를 받았고, 금관국 지역과 주민은 신라의 ‘금관군(金官郡)’으로 편제되어 신라 지배 하에 들어갔다. 가야 왕족은 신라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신라 정계에서 위상을 유지하는 한편, 김유신은 뛰어난 무공으로 삼국 통합을 주도함으로써 태대각간(太大角干), 흥무대왕(興武大王)의 지위로 격상되었다.

신라에 병합되어 ‘금관군’, ‘가야군’으로 편제되었던 김해 지역 사회는 680년(문무왕 20) 5월 ‘금관소경(金官小京)’으로 승격되었다. 금관소경은 757년(경덕왕 16) 지방제도 개편 때에 ‘김해경(金海京)’으로 개칭되었다. 당시 김해 지역사회는 신라 정부가 정복한 지역을 통제할 목적으로 중요 거점에 설치하였던 북원소경(北原小京), 서원소경(西原小京), 남원소경(南原小京), 중원소경(中原小京)과 함께 5소경의 하나로서의 위상을 지니게 된 것이었다.

[행정과 경제]

남북국 시대 금관소경의 권역은 당시 소경의 영역이 2~3개의 영현을 거느린 군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나말 여초 김해부의 권역, 여말 선초 웅신현(熊神縣)과 완포현(莞浦縣)을 속현으로 가진 김해도호부의 권역 정도였을 것이다. 소경에는 군현이 설치되지 않았고, 곧바로 소경-촌으로 연결되는 구조였기 때문에 신라 통일기 금관소경에도 수많은 자연촌이 분포되어 있었다. 이들 자연촌 가운데는 촌 행정의 중심지로서 지역촌 또는 행정촌이 지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금관경 시기 김해 지역에는 분산성(盆山城)을 배경으로 하여 소경의 중심 읍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곳에는 소경의 관아가 자리 잡았고, 중앙에서 파견된 소경의 장관인 사신(仕臣)과 법당주(法幢主) 등 몇몇 군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소경의 장관인 사신은 일반 행정의 책임자이면서 소경의 치안 유지와 군사 지휘의 권한을 가지며, 노동력의 징발, 조세 및 공물의 징수권과 함께 사법권을 행사하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소경의 촌주는 3~4개 촌을 관할하였다고 보는데, 주로 사신을 보좌하여 촌락 행정을 담당하고, 때에 따라 군사적 업무도 수행하였다.

신라 촌락 문서의 서원경 사례를 참고하면, 금관경의 각 촌락에도 9등호제에 의한 편호로서 ‘공연(孔烟)’이 10여 호 정도씩 배치되어 생산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들은 ‘연수유전답(烟受有田畓)’, ‘촌주위답(村主位畓)’, ‘내시령답(內侍令畓)’, ‘관모전답(官謨田畓)’, ‘마전(麻田)’ 등으로 불렸던 지목의 토지를 경작하고, 정부에서 배정한 계연(計烟)에 따라 수취의 의무를 다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촌락민은 뽕나무를 비롯한 여러 유실수를 심어 키워야 했고, 소와 말을 가축으로 사육하여 정부의 병마로 바치거나 농업 경영에 이용하고 있었다.

[사회 변화]

신라 후기 농민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각 지역에서는 호족 세력이 등장하고 있었다. 김해 지역에서는 소충자(蘇忠子)·소율희(蘇律熙) 형제와 김인광(金仁匡) 등이 호족으로 성장하여 김해 지역을 지배하였다. 이 시기 김해 지역의 읍격은 ‘김해소경’이 아니라 ‘김해부’였다. 신라 중앙정부는 김해 지역에서 호족 세력이 등장하자, 현실을 인정하고 김해소경을 김해부로 개편하여 변화된 지역 상황에 대응하고자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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