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640
한자 金庾信
이칭/별칭 흥무대왕(興武大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조원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595년연표보기 - 김유신 출생
활동 시기/일시 629년 - 김유신 낭비성전투 참가
활동 시기/일시 642년 - 김유신 압량주군주 부임
활동 시기/일시 660년 1월 - 김유신 상대등 제수
활동 시기/일시 668년 - 김유신 대당대총관 제수
활동 시기/일시 668년 - 김유신 태대각간 제수
몰년 시기/일시 673년 7월 1일연표보기 - 김유신 사망
추모 시기/일시 1561년 - 김유신 서악서원 배향
출생지 만노군 - 충청북도 진천군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경주시
부임|활동지 압량주 - 경상북도 경산시
묘소|단소 경주 김유신묘 -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 산7-1
사당|배향지 숭무전 -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 307-2
사당|배향지 서발한사당 터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교성리 산41-1
사당|배향지 서악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2길 23[서악동 615]
사당|배향지 대관령 성황사 및 산신각 -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대관령면 대관령마루길 527-35[횡계리 14-256]
성격 무신
성별
본관 김해
대표 관직 상대등

[정의]

삼국 시대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있었던 가락국 왕실의 후손이자 신라의 장군.

[개설]

김서현·김유신은 비록 신라 사회에 진골 귀족으로 편입되긴 하였지만, 신라 최고위 귀족들과 같은 처지에 있지는 못하였다. 숙흘종이 딸 만명을 감금하면서까지 김서현과의 혼인을 반대하였었는데, 이는 김서현의 신라 사회 내에서의 위치가 다른 진골 귀족에 미치지 못하였던 것을 반증한다. 김서현·김유신은 자신들의 출세를 위해 신라 최고위 귀족의 정치적 후광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지왕의 실각 이후 왕위 계승권에서 멀어진 김용춘(金龍春)은 좋은 협력 대상이었다. 김용춘 역시 자신의 세력을 회복하기 위해 군사적 능력을 지닌 김서현을 배후 세력으로 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춘추와 김문희의 혼인은 이렇듯 다분히 정략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김유신의 활동과 정치적 성장은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가계]

김유신(金庾信)[595~673]은 595년(진평왕 17) 만노군(萬弩郡)[현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태어났으며, 신분은 진골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가락국[일명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김구해]이고, 할아버지는 김무력(金武力),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다. 어머니는 만명부인(萬明夫人)인데,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법흥왕의 동생]의 아들이자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의 딸이다. 남동생으로 김흠순(金欽純), 여동생으로 김보희(金寶姬)와 김문희(金文姬)가 있었다. 김흠순은 삼국 통일 전쟁에서 장군으로 활약하였고, 김문희는 훗날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金春秋)와 혼인하여 김법민(金法敏)[문무왕], 김인문(金仁問) 등을 낳았다. 시호는 문명왕후(文明王后)이다.

김유신의 아내인 지소부인(智炤夫人)은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로, 슬하에 김삼광(金三光)·김원술(金元述)·김원정(金元貞)·김장이(金長耳)·김원망(金元望) 등 5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두었다. 서자로 김군승(金軍勝)이 있었다고 한다. 손자로는 김윤중(金允中)·김윤문(金允文), 현손으로는 김유신의 행록(行錄) 10권을 지었다는 김장청(金長淸)이 있다.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하면서 상등의 벼슬과 가락국의 옛 땅을 식읍으로 받았다고 하였으므로, 구형왕의 후손인 김유신 또한 김해 지역을 세력 기반으로 삼았을 것이다.

[활동 사항]

김유신은 15세가 되던 609년(진평왕 31) 화랑이 되었다. 김유신을 따르던 낭도(郎徒)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는데, 불교의 미륵 신앙과 관련 있는 이름이다. 화랑으로서의 수련 과정은 김유신 개인의 정신적, 육체적 성장뿐만 아니라, 낭도들과의 유대 관계를 긴밀히 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화랑도 수련 이후 김유신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629년(진평왕 51)부터이다. 629년 김유신은 중당당주(中幢幢主)로서 김용춘, 김서현 등과 함께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였다. 초반 전세가 불리하였는데, 김유신이 적진에 뛰어들어 적 장수의 목을 베어 왔다. 이에 신라군은 사기가 올라 승기를 잡았고, 성안에 남아있던 고구려군은 두려워하며 항복하였다고 한다. 김용춘 집안과 김서현 집안은 낭비성전투에 함께 참여하면서 더욱 가까워졌던 것 같다. 642년(선덕여왕 11) 김춘추가 청병을 위해 고구려에 갔다가 억류되자, 당시 압량주군주(押梁州軍主)로 재임하던 김유신이 김춘추를 구출하기 위해 3천 명의 결사대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고구려 조정에서는 김유신의 출병이 정하여졌다는 소식을 듣고 김춘추를 풀어주었다.

이후 김유신은 647년(선덕여왕 16)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구귀족 세력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김춘추와 함께 신라 정계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김춘추는 정치와 외교에서, 김유신은 군사적 측면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654년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자, 김유신의 정치적 위상은 더욱 올라갔다. 655년(무열왕 2) 10월에 왕녀 지소를 부인으로 맞아들였고, 660년(무열왕 7) 정월에는 신라 최고위 관직인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되었다.

김유신은 주로 백제와의 전쟁에서 큰 활약을 보였는데, 660년 백제 멸망 당시 황산벌에서 계백(階伯)과 싸운 일화는 특히 유명하다. 백제 멸망 이후에는 백제 잔여 세력의 소탕과 고구려를 정벌하는 당군에 대한 지원에 힘썼다. 661년(문무왕 1) 평양성전투 중 군량이 떨어져 곤경에 처한 당군에게 직접 군량을 수송하여 주기도 하였다. 고구려가 멸망하던 668년(문무왕 8)에는 신라군 총사령관인 대당대총관(大幢大摠管)에 임명되었으나, 노령이었기 때문에 직접 출전하지는 않았다. 고구려 멸망 이후에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비상위(非常位)인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제수받았다. 아울러 식읍(食邑) 500호와 함께 여러 특전도 부여받았다. 이후 나당전쟁기에도 국왕에 자문하는 등 신라 정계의 원로로서 활동하다가 673년(문무왕 13) 7월 1일 사망하였다.

[묘소]

김유신의 무덤은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 산7-1번지 송화산 자락에 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 명칭은 ‘경주 김유신묘’이다.

[상훈과 추모]

김유신 사후 문무왕은 성대한 의장을 갖추어 금산원(金山原)[경상북도 경주시 송화산 기슭으로 추측]에 장사 지내고, 비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게 하였다고 한다. 뒤에 흥덕왕[『삼국유사』에서는 경명왕 때라고 함]은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 가락김씨종친회는 매년 경주시 숭무전(崇武殿)에서 김유신과 부인에게 춘향대제와 추향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한편, 충청북도 진천군 태령산에 김유신의 사당이 있었는데, 신라 때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봄·가을로 치제하였다고 한다. 1561년(명종 16)에는 경주 서악서원(西岳書院)에 배향되었으며, 대원군 때도 철폐되지 않았다. 이외에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대관령면에 있는 대관령 성황사 및 산신각은 김유신을 산신으로 모시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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