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644
한자 金方礪
영어공식명칭 Kim Bangryeo
이칭/별칭 여용(汝用),축은(築隱)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363년 - 김방려 교주도 군사 징발
활동 시기/일시 1364년 6월 - 김방려 중국 사행
부임|활동지 교주도 - 강원특별자치도
묘소|단소 김방려 묘소 - 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
사당|배향지 사현사 - 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 용안로 709-28[수양리 96-2]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김해
대표 관직 부령

[정의]

고려 후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문신.

[가계]

김방려(金方礪)의 자는 여용(汝用)이고, 호는 축은(築隱)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김경신(金敬臣)이고, 할아버지는 첨의평리를 지낸 김원현(金元鉉)이며, 아버지는 판도판서를 지냈다는 김대덕(金台德)이다. 아들은 청도군수를 역임한 김순생(金笋生)이고, 손자는 조선 세종 때 진사에 급제한 김계인(金係引)과 사헌부집의·한성부윤을 역임한 김계희(金係熙)이다.

[활동 사항]

김방려는 고려 말에 활동한 문신이다. 권근(權近)은 1383년(우왕 9) 10월에 쓴 「중현(仲顯) 김방려에게 주는 시의 서문」에서 김방려가 어사대에서 활동하였다는 것, 1363년(공민왕 12)의 난리 때 부령(副令)으로 있으면서 교주도(交州道)[현 강원특별자치도]에서 군사를 잘 모아서 공을 세워 공민왕이 소중히 여겼다는 것, 전녹생(田祿生)이 원나라에 사신 갈 때 부사로서 수행하였다는 사실 등을 언급하였다. 뒷날 권근은 김방려에게 「김해로 돌아가는 부령(副令) 김방려를 전송하면서」라는 제목의 시를 주었는데, 부령은 1362년(공민왕 11) 관제 개편 때 전교시(典校寺)·종부시(宗簿寺)·예빈시(禮賓寺) 등 시(寺) 계열 관부의 장관인 영(令) 다음의 차석 관직이다.

김방려가 1363년 교주도에서 군사를 모아 대응하였다는 난리는 1363년 말에 발생한 덕흥군 침입을 말하는 것이다. 전국에서 병사를 징발하였는데, 김방려는 교주도에서 군사 징발을 잘 처리함으로써 공민왕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김방려는 전녹생을 따라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김방려가 전녹생을 따라 사신으로 간 시기는 1364년 6월이었다. 김방려는 중국의 지식인 장저(張翥)·김원소(金元素)·유인본(劉仁本) 등과 교유하며 시문을 주고받았는데, 이때 가져왔던 시문은 전쟁 통에 소실되어 버렸다. 후에 일본에서 구한 『우정고(羽庭藁)』에서 김방려가 유인본에게 받았던 「동한의 김축은에게 주다[贈東韓金築隱]」라는 시를 찾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김방려의 벼슬길은 우왕 즉위 후에 점차 위기를 맞았다. 우왕 즉위 후 권신의 등장과 외교 노선의 갈등 등으로 정계가 혼돈 속에 빠져들면서 김방려는 정치 상황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특히 1375년 5월 북원 사신의 입국 문제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 속에서 김방려는 전녹생 등의 입국 반대 입장에 서면서 타격을 입게 되어 고향 김해로 낙향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방려의 문집으로 『축은집』이 있다.

[묘소]

김방려의 무덤은 「축은선생행장」에서 경상남도 김해의 덕도(德島)에 있다고 하였다. 현재 행정 구역상으로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에 해당한다.

[상훈과 추모]

김방려는 전라남도 장흥군의 사현사(四賢祠)에 배향되어 있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