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6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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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克儉 |
영어공식명칭 | Kim Geukgeom |
이칭/별칭 | 사렴(士廉),괴애(乖崖),담헌(淡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상현 |
출생 시기/일시 | 1439년 9월 - 김극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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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66년 - 김극검 중시 갑과 장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77년 - 김극검 사헌부장령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482년 - 김극검 사간원사간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489년 - 김극검 황해도관찰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491년 - 김극검 전라도관찰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492년 - 김극검 동지중추부사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499년 - 김극검 사망 |
출생지 | 퇴은리 - 경상남도 김해시 |
묘소|단소 | 김극검 묘소 -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신용리 마곡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김해 |
대표 관직 | 동지중추부사 |
[정의]
조선 전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문신.
[가계]
김극검(金克儉)[1439~1499]의 본관은 김해이다. 자는 사렴(士廉)이고, 호는 괴애(乖崖)·담헌(淡軒)이다. 할아버지는 중추원부사·인순부윤(仁順府尹) 등을 역임한 김계희(金係熙)이며, 아버지는 증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김강의(金剛毅)이다. 아들로는 김관(金寬)과 김증(金曾)이 있으며, 딸은 양침(梁沈)에게 출가하였다.
[활동 사항]
김극검은 1439년 9월에 고조할아버지 김방려 때부터 거주한 김해의 퇴은리 옛집에서 태어났다. 21세에 생원 및 진사과에 모두 1등으로 합격하고, 1459년(세조 5) 문과에 급제하였다. 1466년(세조 12) 중시(重試) 갑과(甲科)에 장원 급제하였고, 발영시(拔英試)에도 합격하였다. 1467년(세조 13)에는 조운사 함우치(咸禹治)의 종사관으로서 경상도 연안의 군자미 10만 석을 함길도로 운송하는 공로를 세웠으며, 세조가 승하하자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예종 때는 사헌부장령·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였으며, 예종이 승하하자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성종 때는 『세조실록』과 『예종실록』 수찬의 공로로 포상을 받았으며, 외직으로 나가 뛰어난 치적을 보였다. 1477년(성종 8) 이조에 의해 사표(師表)로 추천되어 사헌부장령이 되었으나, 신주(辛柱)의 분경(奔競)에 연루되어 고신(告身)이 거두어졌다. 1478년 고신을 돌려받았으며, 1482년(성종 13) 사간원사간에 제수되었다. 이후 언관으로 활약하였다.
1489년(성종 20) 황해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강도 김일동(金一同) 무리를 잡지 못하여 직첩이 거두어졌다. 1491년(성종 22) 전라도관찰사에 제수되어 나주 금성산의 음사(淫祀)를 금단하였다. 1492년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나, 방물을 도둑맞아 다시 고신을 환수당하였다. 이후 다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고, 성종이 승하하자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연산군 때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가 1499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극검의 율시와 절구가 『속동문선(續東文選)』에 남아있다.
[묘소]
김극검의 무덤은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신용리 마곡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