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6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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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曺植 |
영어공식명칭 | Jo sik |
이칭/별칭 | 건중(楗仲),남명(南冥),산해(山海),방장산인(方丈山人),방장노자(方丈老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광철 |
출생 시기/일시 | 1501년 6월 26일 - 조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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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20년 - 조식 사마시 초시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572년 2월 8일 - 조식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576년 - 조식 덕천서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576년 - 조식 용암서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609년 - 조식 신산서원 배향 |
출생지 | 경상도 삼가현 토동 -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
묘소|단소 | 산청 조식 유적 -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 |
사당|배향지 | 덕천서원 -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남명로 137[원리 219-3] |
사당|배향지 | 용암서원 -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남명로 72-5[외토리 616-5] |
사당|배향지 | 신산서원 -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산해정길 123-26[주동리 737]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창녕 |
[정의]
조선 전기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활동한 학자.
[가계]
조식(曺植)[1501~1572]의 본관은 창녕이다. 자는 건중(楗仲)이고, 호는 남명(南冥)·산해(山海)·방장산인(方丈山人)·방장노자(方丈老子) 등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생원 조안습(曺安習)이고, 증조할머니는 강성 문씨 문익점의 종손녀이다. 할아버지는 봉사 조영(曺永)이고, 할머니는 임천 조씨 조지서(趙之瑞)의 누이다. 아버지는 승문원 판교를 지낸 조언형(曺彦亨)이고, 어머니는 인천 이씨 충순위(忠順衛) 이국(李菊)의 딸이다.
부인은 남평 조씨로 충순위 조수(曺琇)의 딸인데,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조차산(曺次山)은 9세에 요절하였고, 딸은 만호 김행(金行)에게 시집가 두 딸을 두었다. 두 딸은 각각 김우옹(金宇顒)과 곽재우(郭再祐)에게 시집갔다. 측실은 은진 송씨로 첨정 송인(宋璘)의 딸인데,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의령현감 조차석(曺次石), 칠원현감 조차마(曺次磨), 만호 조차정(曺次矴)이며, 딸은 군수 조신도(趙信道)에게 시집갔다.
[활동 사항]
조식은 1501년(연산군 7) 6월 26일 경상도 삼가현[현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토동(兎洞) 외가에서 태어났다. 1504년 아버지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면서 5~6세경 서울로 올라가 26세 때까지 살았다. 1520년(중종 15) 20세의 나이로 사마시 초시(初試)와 문과 한성시에 합격한 후, 1521년 문과 회시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에도 1533년 가을에 30세의 나이로 향시에 응시하여 2등을 하지만, 1534년 봄 명경시에서 합격하지 못하였다. 1537년 동당시에는 응시하지 않고 이후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다.
1530년 30세 때 어머니를 모시고 처가가 있는 김해 신어산 아래 탄동(炭洞)으로 이사하고, 산해정을 지었다. 이후 47세에 삼가현 토동으로 귀향할 때까지 17년간 김해에서 처사로 지내며 활동하였다. 이때 성운(成運)·이원(李源)·신계성(申季誠)·이희안(李希顔) 등이 김해로 찾아와 교유하였고, 이준경(李浚慶)과 이림(李霖)은 『심경(心經)』을, 송인수(宋麟壽)는 『대학(大學)』을, 성우(成遇)는 『동국사략(東國史略)』을 보내주어 학문적 교유를 심화하였다.
김해에서 명소를 찾아 몇 건의 시문을 남겼다. 산해정에 대해서는 「산해정에서 대나무를 심다」, 「산해정에서 주세붕에게 차운하다」 등 7편의 시를 남겼고, 신어산 동쪽 귀암사(龜巖寺)에 들러서는 「제귀암사」라는 시를 남겼다. 황산강과 관련하여서는 「제황강정사(題黃江亭舍)」라는 시를 지었고, 「분성에서 보리타작하는 소리를 듣고」에서는 김해 농촌 풍경을 묘사하였다. 1547년 봄에 김해부사 김수문(金秀文)이 함허정을 중수하자 조식이 기문(記文)을 짓고 시를 붙였다.
44세 때인 1545년(중종 40) 11월에는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삼년상을 마치고 나서 1547년(명종 2)에 삼가현 토동 옛집으로 귀향하였다. 토동의 집 근처에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사(雷龍舍)를 지어 강학과 교유의 공간을 조성하고, 60세 때까지 10여 년간 활동하면서 이황을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과 교유하고 제자를 양성하였다. 1561년 61세 때 지리산 덕천동으로 들어가서 산천재를 짓고, 1572년 2월 8일 사망할 때까지 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학문과 저술]
조식의 학문과 사상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을 바탕으로 하면서 실천궁행(實踐躬行)을 강조하였다. ‘경(敬)’과 ‘의(義)’를 표방한 것이 그것인데,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외부 사물을 처리해 나간다는 자세로서 사회 현실과 정치적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비판하였다.
학문과 교육의 방법론에 있어서도 성리학의 본원과 심성에 관한 내용을 먼저 가르치는 이황의 방법과 달리, 『소학』 등 기초적인 내용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아울러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 즉 낮고 쉬운 것을 배워 깊고 어려운 것을 깨닫게 한다는 단계적이고 실천적인 학문 방법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남명집』과 『남명학기유편(南冥學記類編)』·『신명사도(神明舍圖)』·『파한잡기(破閑雜記)』·『남명가(南冥歌)』·『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가 전한다.
[묘소]
조식의 무덤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조식은 사망 후에 통정대부 사간원대사간 영의정으로 증직되었다. 1576년(선조 9)에 산청 덕천서원(德川書院), 합천 용암서원(龍巖書院)에 배향되었으며, 1609년(광해군 1)에는 김해 신산서원(新山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