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7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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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孫明祚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하지영 |
출생 시기/일시 | 1884년 8월 7일 - 손명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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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2일 - 손명조 무계리장터 만세 시위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19년 4월 12일 - 손명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손명조 대통령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손명조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경상남도 김해시 유하동 |
활동지 | 무계리장터 -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로 287-22[무계동 189-3]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손명조(孫明祚)[1884~1919]는 1884년 8월 7일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유하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12일 김해군 장유면 무계리[현 경상남도 김해시 무계동]의 무계리장터에서 발생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날 시위는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3월 1일 파고다공원 독립선언식에 참가한 김종훤(金鐘烜)이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오면서 준비되었다. 4월 11일 김승태(金升泰), 이강석(李康奭), 최현호(催鉉浩) 등 장유면 인사들과 회합한 김종훤은 장유면에서도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4월 12일 무계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한 김종훤 등은 태극기를 만들고 동지를 규합하며 시위를 준비하였다.
거사 당일인 4월 12일 정오경 무계리장터에는 이미 2,000여 명의 군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김종훤 등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뒤 만세를 부르자, 현장에 있던 많은 군중이 호응하며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손명조는 이날 군중의 한 사람으로 시위에 참여하여 만세를 높이 부르며 시장 곳곳을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무계리헌병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일본 헌병이 군중을 제지하며 총을 난사하였다. 이때 손명조는 김선오(金善五), 김용이(金用伊)와 함께 앞장서서 저항하다가 헌병이 발포한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헌병의 발포로 흩어졌던 사람들이 손명조 등의 사망 광경을 목격하고는 다시 모여 돌을 던지며 주재소 건물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김해헌병분견소에서 파견한 지원병이 다시 발포하며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상훈과 추모]
손명조는 1977년에 대통령표창,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