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413
한자 長有面 茂溪里 萬歲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하지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4월 12일연표보기 - 장유면 무계리 만세운동 발생
발생|시작 장소 무계리장터 -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로 287-22[무계동 189-3]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김종훤|김승태|이강석|최현호|조용우|손명조|김용이|김선오

[정의]

1919년 4월 12일 경상남도 김해 장유면 무계리장터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역사적 배경]

1919년 3월 30일 김해 읍내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된 이후 인근 면 단위 지역에서도 만세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장유면에서는 4월 3일 신문리장터에서 만세 시위가 계획되었으나, 사전에 발각되면서 실행하지 못하였다.

[경과]

장유면 무계리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 독립선언식에 참가한 장유면 유하리[현 경상남도 김해시 유하동] 김종훤(金鐘烜)이 독립 선언서 수백 장을 숨겨 돌아온 이후 본격적으로 준비되기 시작하였다. 김종훤은 4월 11일 김승태(金升泰), 이강석(李康奭), 최현호(催鉉浩), 조용우(趙鏞宇) 등 지역 인사들과 한자리에 모여 장유면 거사를 논의하였다. 거사일은 4월 12일 무계리 장날로 정하였고, 각자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 주민들을 규합한 후 무계리장터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거사 당일인 4월 12일 오후 12시경 무계리장터는 2,000여 명의 군중들로 가득 차 있었다. 김종훤 등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은 이에 호응하며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시위대는 무계리장터 중심가를 행진하다가 무계리헌병주재소까지 갔다. 일본 헌병들이 시위를 제지하며 총을 난사하자 시위대는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람도 있었다. 인명 피해가 발생하자 군중들은 무계리헌병주재소를 포위하고 투석하는 등 주재소 건물을 공격하였다. 김해헌병분견소에서 지원병이 도착하여 또다시 발포하자 시위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결과]

장유면 무계리 만세운동 당시 선두에 서서 저항하던 손명조(孫明祚), 김용이(金用伊), 김선오(金善五) 세 사람이 일본 헌병의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순국하였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외에 김종훤, 김승태, 이강석 등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장유면 무계리 만세운동은 김해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만세 시위로, 2,000여 명의 지역민이 참여하였다. 일제는 처음부터 발포하는 등 강경하게 진압하였는데, 현장에서 3명이 순국하는 등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장유면민의 강력한 항일 의지를 보여준 만세 시위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