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724
한자 黃贊淑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배병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5년 3월 28일연표보기 - 황찬숙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9년 3월 - 황찬숙 김해청년동맹 집행위원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30년 6월 3일 - 황찬숙 대구복심법원 징역 10월 선고
활동 시기/일시 1932년 - 황찬숙 김해농민조합 청년부장 취임
몰년 시기/일시 1970년 1월 26일연표보기 - 황찬숙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3년연표보기 - 황찬숙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경상남도 김해시 전하동 지도보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산23-1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김해청년동맹 집행위원장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황찬숙(黃贊淑)[1905~1970]은 1905년 3월 28일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전하동에서 태어났다. 김해청년동맹과 신간회, 김해농민조합, 조선일보 김해지국 등에서 활동하며 지역의 사회 운동을 이끌었다. 특히 1928년 4월에는 김해청년동맹 제2회 정기대회에서 체육부 임원으로 선임되었고, 1929년 3월에는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무렵 동래청년동맹 창립 1주년을 축하하며 보낸 전문의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0여 일간 구류되기도 하였다.

1930년 2월 김미동(金美東)·강윤갑(姜允甲)·황수연(黃守淵) 등과 함께 「약소 민족 제군에 격함」이라는 격문 1,000장을 인쇄하여 김해 읍내 각처에 살포하였다. “야수와 같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라”, “조선 총독 정치에 절대 반대하라”, “약소 민족을 해방하라” 등의 격문 구호로 인해 1930년 6월 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2년에 김해농민조합 청년부장으로 선출되어 활동을 재기하였지만, 하자마농장 소작쟁의로 다시 피검되었다. 이후 경찰의 감시로 원활한 사회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5년 오사카 사카이시[堺市] 소재 전평천주일반노동자조합(全評泉州一般勞動者組合) 제1회 정기대회에서 상임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귀국 후에 1937년 9월 김해적색농민조합사건에 연루되어 노재갑 등 16명과 함께 또다시 피검되었다. 해방 후에 동아일보 김해지국장으로 활동하였고,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의원 후보로 무소속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70년 1월 26일 사망하였다.

[묘소]

황찬숙은 1997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황찬숙은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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